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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05. 2019

코니 윌리스 <시간여행 시리즈>

여러분이 타임머신을 처음 알게 된 건 무엇을 통해서였나요? 2300년에서 건너온 미래인? 나의 과거와 미래를 정확하게 맞추는 역술인? 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고 고백했나요? 그럴 리가 없지요.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타임머신이 없으니까, 미래에 타임머신이 발명될거란 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지요. 과거에서 왔느니, 미래에서 왔느니 하며 던지는 말들은 모두 사람을 현혹시키는 수법일 뿐입니다. (코니 윌리스의 소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단편집 화재 감시원>에 수록된 내부소행 Inside Job 참조)


저는 “백 투 더 퓨쳐”라는 미국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요, 벌써 제목부터 기존의 직선적 시간개념을 상큼하게 넘어서지요. 그에 걸맞게 이야기도 활기차고 거침이 없습니다. 괴짜박사가 개발한 타임머신 카 - 이 차는 멋집니다. 타임머신이라서가 아니라 디자인이 멋져요. 한 번 찾아보세요! 장남감도 갖고 놀았었죠…(아재요) - 를 타고 과거와 미래를 종횡무진 누빕니다.


“백 투더 퓨쳐”에서도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타임머신은 언제 어디서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데려다 주는 무적의 머신입니다. 그렇기에 타임머신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은 타임머신을 중요하고 신비로운 소재로 다룰 수는 있어도 그 이상으로 끌어올리기는 무척 어렵죠.


하지만 오늘 소개드리는 코니 윌리스의 소설들 <시간여행 시리즈>는 시간여행을 다루되 타임머신이 주된 소재는 아닙니다. 타임머신에 대한 묘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네트, 베일 정도의 단어가 형태의 단서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보다는 그 시대 시간여행이 가지는 한계, 조건, 혹은 어떤 거대한 법칙 - 시리즈 후반으로 가면서 그 정체가 조금씩 밝혀집니다. - 이 중요하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21세기, 치열한 연구를 통해 드디어 인류는 과거로의 타임 리프를 해냅니다. 옥스퍼드 칼리지의 제임스 던워디 교수는 타임 리프를 주관하며, 타임 리프의 목적은 주로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관찰, 탐구에 국한됩니다. 과거로 간 역사학자가 과거에 개입해서도 안되고 개입할 수도 없다는 게 기본 상식입니다. 물론 시리즈의 다음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이러한 설정이 흔들리게 되고, 새로운 법칙에 대한 연구가 뒤따르며,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발표된 <올 클리어>에서는 그 법칙이 송두리째 뒤집힙니다. 아니 어쩌면, 등장인물들은 알지 못하지만 독자는 예상할 수 있었던, ‘시공 연속체’의 진면모가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요?


발표상으로는 단편인 <화재 감시원>이 먼저지만 소설 속 시점으로는 첫 장편이자 단일 소설로는 가장 긴 <둠즈데이 북>이 먼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단편인 <화재 감시원>을 읽으며 코니 윌리스 식 타임 리프의 분위기를 익힌 후 <둠즈데이 북>을 집어드시길 권합니다. 수영하기 전 준비운동이 필요한 것처럼, <둠즈데이 북>이라는 무시무시한 - 정말 그렇습니다 - 세계는 5미터는 넘어보이는 깊이를 가진 수영장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요.


<화재 감시원>의 주인공은 ‘존 바솔로뮤’입니다. 그는 역사학도로서 1940년 영국이 맞이하는 히틀러의 대공습 당시로 들어가 폭격을 맞고 불에 타는 성당을 지키려는 민간인들인 <화재 감시원>을 관찰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짧고 건조하기까지 한 단편은 그러나, 이후 <올 클리어>까지 진행될 시리즈의 기본 메시지를 전합니다. 역사적 분기점이 있는 시대일수록 더더욱, 개개인의 마음과 의지와 작은 행동이 큰 여파를 초래한다는 것을 화재감시원들의 처절한 사투 속에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영국을 사랑하는 코니 윌리스가 <시간여행 시리즈>의 주된 배경을 1940년 영국의 대공습으로 잡은 건 딱 맞아떨어지는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나치가 패망한 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1940년 영국을 향한 대공습, 애니그마의 활약을 바탕으로 한 영국의 첩보전, 이것이 주춧돌이 되어 성립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서유럽과 소련의 맹공을 통한 나치의 패망 … 연합군의 반격의 불씨를 지켜낸 영국 전역에서의 사투는 역사적 분기점이라 할만 합니다. 숱한 변수들이 있었고 그 중 하나만 어긋났어도 지금의 역사는 없었을 테니까요.


“과거로만 갈 수 있다”는 설정은 코니 윌리스의 소설에서 그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 훌륭하게 기능합니다. 미래로 간다는 설정은 매력적이지만 거기에서 인류애적 가치를 담아내려면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할 겁니다. 만약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지는 시대로의 타임 리프여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그래서 코니 윌리스는 설정에 충실하게 “과거로만 갈 수 있고”, “절대로 과거에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하고 싶어지지도 않을” 만한 포인트를 짚어낸 겁니다. 그것이 1940년 대공습 기간이었던 것이죠. 위태한 그 시기 혹시 사소한 개입으로 나치가 승리하는 결말을 바라는 독자는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 세계라면 차라리 멸망을 기도하고 말죠. (이 작가를 나치당원이 싫어합니다.)


예외가 되는 케이스가 지금부터 소개할 <둠즈데이 북>입니다. 시리즈 중 단연 어두운 톤의 이 소설의 배경은 중세 ‘흑사병 창궐’ 때의 어느 유럽 가정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야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로 보여 코웃음이 나올 이야기이지만 중세인들에게 흑사병이 종말의 징조로 보일 수밖에 없었겠다고 수긍하게 할만큼 시대 묘사가 탁월합니다. 소설은 시종일관 우리가 알고 있던 예정된 결말로 흘러가며, 재미있는 것은 시리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현대의 옥스퍼드’가 공격당합니다. 좀 너절하게 비유하자면 멀티를 띄우던 와중에 본진이 털리는 격이랄까요? (게임 이야기입니다…)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죄여오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다음 소설인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둠즈데이 북>과는 정반대입니다. 국내 번역본의 소개말처럼 “슬픔이란 1그램도 없”죠. 두 권을 연속으로 읽고 나면 코니 윌리스가 얼마나 탁월한 작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2차 대전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다음 작품 <블랙 아웃>과 <올 클리어>가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며 촘촘한 모직물을 잣는다면, <둠즈데이 북>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그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순서에 따라 <개는 말할 것도 없고>까지 달려온 독자라면 모르긴 몰라도 “다음 작품에서는 이 비극과 희극의 교향곡을 어떻게 지휘할까?”하는 기대감에 심장이 벌렁일 겁니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특별한 이유는 단지 즐거운 시간 여행물이어서가 아닙니다. 슬슬 타임 리프에 관한 떡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물론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끄는 건 말장난과 슬랩스틱 개그와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작가의 무한 수다와 주인공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한 스푼의 로맨스이기에, 어느덧 타임 리프의 정체를 따라가랴 소설의 재미를 따라가랴 정신없이 눈을 굴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시리즈가 일단락되는 <블랙 아웃>과 <올 클리어>는 2권씩으로 이루어진 연작입니다. 연작이자 역작이죠. 드디어 본격적으로 2차대전 당시 1940년부터의 영국 대공습이 무대가 되며, <화재 감시원>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언뜻 언뜻 보이던 그 시대에 대한 상황 묘사가 극적으로 펼쳐집니다. 도대체 <둠즈데이 북> 같이 무거운 작품을 쏟아낸 후에 - 비록 시간차가 크다고는 하지만 - 다시 이런 ‘친절한 비극’을 써낸다는 게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에너지이긴 하지만 작가가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쏟아 부어대는 광경이 작품 속에서 환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치열합니다.


각자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별 생각없이 과거로 간 세 명의 역사학도들, 그들 앞에 놓인 ‘혼돈계인 시공간 연속체’의 선물은 하나씩 풀어낼때마다 놀라운 반전의 연속을 던져줍니다. 작가의 특기는 한 챕터를 끝낼 때 짧지만 반전이 담긴 문장을 넣는 것인데, - 마치 한국의 일일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소설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페이지만 넘기면 1초만에 다음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 독자는 챕터가 끝날 때마다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그렇게 기꺼이 ‘블랙 아웃’된 그 시대의 비극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코니 윌리스의 <시간여행 시리즈>는 결코 완전한 비극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1그램의 슬픔도 없다는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도 완전한 희극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 주인공들의 시대에 고양이가 멸종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정도면 이 소설은 설정 하나로 완전한 비극을 창조한 유일무이한 작품 아닌가요? - 물에 술을 탔다면 그녀의 소설들이 그 많은 상을 탔을 리가 없었을 테니 희극과 비극을 칵테일 만들듯 적절하게 섞어내는 진기한 솜씨로 뻔한 결말을 뻔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 능력의 원천은 코니 윌리스가 가진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기대, 신뢰같은 것인 듯 합니다. 마치 절대적인 고통과 절망 속에서 신이 정말 있는 거냐고 울부짖으면서도 눈물 고인 눈으로 오늘도 더듬더듬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작은 이들’에 대한 헌사라는 듯이, 코니 윌리스의 소설 속에는 그런 이들의 일상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게 처음에는 귀찮게 느껴지는 작가의 속사포 수다가 나중에는 되려 숙연한 감정을 가져다 주는 이유일 겁니다.


자, 이제 몸 풀기를 시작하죠. <화재 감시원>부터 시작해볼까요? 전자책으로 단편집을 사셔도 좋고, <올 클리어> 출간 기념 이벤트로 제공되는 가이드북을 통해 만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책을 집어드는 순간, 마치 타임 리프를 한 듯 시간이 순삭되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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