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의 리뷰
책, 음악, 만화, 영화, TV, 게임 등의 매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대중문화가 주류문화로 자리잡으면서 명작 Masterpiece 의 정의와 선정기준도 변화했습니다. 더 이상 전문가의 손길에 맡기지 않고 대중문화의 향유자 개개인이 좋은 작품, 좋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러한 분위기는 네트워크 기술이 가파르게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럼 명작의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명작의 조건은, 독자가 그 이야기를 선택하고 이야기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가져가게 될 정서의 흐름을 잘 예상하고 그것을 포착하여 십분 활용하고, 나아가 그것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극대화시키는 것입니다. 뻔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나아가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소재를 택해도 그것을 얼마나 독자의 입장을 헤아려 그려내고 기술적 운영으로 녹여내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죠.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만화 <진격의 거인>은 인터넷에서 '밈'으로 활용되어 유명세가 더해지기도 했지만, 돌풍을 일으키기에는 어려운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와 그것을 운용하는 기술의 힘으로 저력을 발휘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거인'이라는 존재가 처음 작품을 대하는 독자에게 쉽지 않은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작가는 최대한 장벽을 낮추는 데 성공합니다. 처음에는 거인이 징그럽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지지만 읽다보면 익숙해지게 되는데, 만화는 독자가 평균적으로 그렇게 느낄 타이밍에 맞춰 스토리를 끌고 갑니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도 독자와 비슷한 타이밍에 거인에 익숙해지는 것이죠. 독자가 작품 속 주인공과 동기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이번에는 영화에서 한 번 찾아볼까요? 명작으로 불리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도 명작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영화는 마치 그 시절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감정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어떤 정치적 입장에도 익숙하지 않고 그저 소박한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1939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절박한 상황이지만 그런 가능성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재미있고 행복한 생활을 코믹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냅니다. 지금 다시 봐도 로베르토 베니니의 코믹한 연출과 사랑스러운 연기는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데요, 하지만 불행은 예고없이 그러나 어김없이 찾아오고, 전쟁이라는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비현실적인 흐름 앞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적응해 나갑니다.
그런데 영화 개봉 직후, <인생은 아름다워>를 두고 전쟁의 참상을 미화했다거나 수용소의 비극을 너무 가볍게 다뤘다는 평가가 전문가에게서 쏟아졌다고 합니다. 정작 관객은 영화가 안내하는 감정의 흐름에 젖어들어 여느 전쟁 고발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쟁의 참상을 가슴 깊이 느꼈는데 말입니다. 영화는 관객이 느낄 정서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 내는 이야기 전개와 연출을 보여주었고, 그 속에 전쟁의 참상을 평화로운 일상과 역설적으로 대비함과 동시에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줌으로써 전쟁과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더 비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인지를 뚜렷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옛날 음유시인이라 불렸던 이들, 어디선가 경험하거나 상상하거나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를 잘 엮어서 빼어난 기술로 퍼뜨리며 생계를 유지했던 이들은 오늘날 "명작"을 만드는 이들의 조상입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통쾌함을 제공하고, 상상력을 북돋으며, 때로는 날카롭게 파고들어 자신을 뒤돌아보게도 하고, 미칠듯이 웃겼다가 또 하염없이 슬프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오늘도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명작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믿고 의지할 데 없는 이 풍진 세상, 우리 주변 손 닿는 곳에 명작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겠죠. 그렇게 또 하루를 버틸 수 있겠죠. 새삼 명작에게 감사하게 되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