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엔틸드 Nov 08. 2019

공동정범 : 공동정범

(2018년 1월  21일에 씀.)


나는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리고 9년 전 그 현장의 소식을 비교적 빨리 접했던 사람으로서 용산참사에 대한 일말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었다. (엔틸드, 냄새) 그 노래의 주제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용산의 남일당 건물과 다를 바 없는 현장들이 우리 평범한 일상에까지 깊이 침투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그 평범함을 다시 용산참사 생존자들에게 투사하여 우리에게 다시 기억하고 행동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9년 전 그 날 이후로 그들은 결코 평범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임을 드러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 참사를 기억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제목인 공동정범. 일반적인 의미는 우리가 아는 ‘공범’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모든 언어는 발화자와 발화의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리뷰의 제목과 부제가 같은 단어인 이유다. 이쯤이면 아마 공권력과 철거민들이 서로를 향해 사용하는 동음이의어의 차이쯤으로 넘겨짚을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식의 뻔한 구도가 아니라서 신선하고, 또 그래서 무거우며 복잡하다. 그리고 영화는 진행되는 내내 이렇게 무겁고 복잡한 상황에 처한 투쟁 현장이 비단 용산 뿐만이 아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영화 내내, 특히 영화 중반부터 내 생각을 사로잡은 것은 용산을 통해 다른 현장을 보게 하는 이 확장성이었다. 조금 스포일링하자면 영화는, 우리가 궁금해하는 진상의 하나인 “화재원인”에 대해 깊이 다루지 않는다. 아니, 화재원인이 규명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에 집중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 나는 그 이유가 두개의 문 제작자이기도 한 두 감독이 몇 년간 꾸준히 생존자들을 만나며 갖게 된 공통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사자와 연대자, 이른바 주범과 공동정범의 관계, 관점과 태도의 차이, 그것이 사건과 만나면서 전개된 다양한 양상들, 이후 몇년 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억압된 기억과 남은 기억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쌓여 만들어 낸 원망과 오해. 사건 후 9년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에 담긴 이 복잡하고 무거운 주제들을 영화는 불과 두 시간 남짓 동안 풀어놓고 있다.


용산참사는 보통의 현장과는 분명 다르다. 당사자 연대자 구별할 것 없이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같은 현장에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았다는 이 사실이, 다른 투쟁현장과 용산참사를 구분짓는 중요한 분기점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용산의 특수한 상황은 모든 투쟁현장이 겪게 될 수 있는 문제들을 다이나믹하고 밀도있게 드러낸다. 영화의 끝에서, 연대자 중 한 명은 “진상규명이 되더라도 우리 (당사자와 연대자)가 하나가 되어 진상규명을 이룰 때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말을 한다.


여기에서의 ‘하나’는 정치인들이 곧잘 내뱉는 레토릭인 ‘통합과 화합’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동지 혹은 가족의 죽음이 엮인 이 갈등은 그저 봉합될 수 없다. 당사자와 연대자들 모두 이를 느끼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갈등에 맞서고 있고, 그렇게 진행중인 또 하나의 싸움이 이들을 하나로 엮어낼 때 비로소 이들은 새로운 의미의 ‘공동정범’이 된다. 불의한 공권력은 이들을 사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공동정범’을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단어는 이들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용산참사와 그를 둘러싼 사실들과 진실들로부터, 확장성이 던져주는 보편적인 질문들까지. 영화는 이 많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었는데, 사안의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영역의 많은 정보를 늘어놓는 대신 이미 만들어져 있는 참사 이후의 서사를 끌어내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무겁고 복잡한 생각들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참사의 서사를 단순히 비극으로 점철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고민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분명 불편하고 무겁고 복잡한 심경으로 영화관을 나서겠지만, 나는 바로 그런 사람들과 용산을, 투쟁현장을,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람 사이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변화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싸움은 이제야 시작단계에 섰다. 그 긴 호흡의 싸움에서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이들은 바로 새로운 연대자들이다.


영화는 대놓고 말한 적이 없지만 나에게는 이명박과 김석기 그리고 그들의 만행을 지탱했던 사회의 구조가 그 어느 때보다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아마 당신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이야기할 거리는 충분하다. 그 이야기의 끝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안고 헤어질 때, 우리는 새로운 연대자가 될 수 있다. 아니, 공동정범이 될 수 있다. 9년이 지났다. 이제 더는 지체할 수 없다.


———————————————————————————————————————————


나는 늘 현장에서 연대자였다. 연대자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던 건,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되 최종 결정권은 당사자에게 있다는 점이었다. 그 싸움을 내 싸움처럼 뛰어들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건널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비슷한 이슈의 다른 현장에서 당사자인 사람이라도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연대자다. 그것을 잊어버려서 오히려 투쟁에 걸림돌이 되는 사례를 숱하게 봐 왔기에, 무엇보다도 이 점을 명심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가치는, 어떤 순간에 정서적인 타격으로부터 나에게 피할 구멍이 되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이 급박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이고, 그렇기에 안타깝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교묘한 자기합리화의 위험이 이 생각에는 도사리고 있다.


현장을 경험한 이들이 이제 막 현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건네는 충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충고는 “투쟁 당사자에 대한 낭만화를 벗어나라”이다. 당사자는 그가 투쟁이 필요한 상황에 놓였을 뿐 그것을 빼면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열정에 불타 연대의 발걸음을 옮긴 이들 중에는 당사자를 무조건 선하다고 여기거나, 언제나 윤리적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거라 기대하고, 나아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는 이들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면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아예 판을 떠나버리기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명작의 조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