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발굴
2016. 5. 2
일요일 오전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가 영화 '4등'을 소개하는 걸 들었습니다. 꼭 봐야하는 영화라면서, 같은 사랑 이야기도 드라마는 '클리셰'에 충실해서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반면 영화는 클리셰를 벗어나거나 살짝 비트는 것으로 영화만의 재미를 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4등이라는 영화가 그런 영화의 작법에 충실하니, 꼭 한 번 보기를 권한다는 평가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래를 떠올려 봤습니다. 노래에도 소위 '클리셰'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면 주제처럼 반복되는 멜로디/코드 진행을 가리키는데, 보통은 음악 흐름 전반에서 자주 사용되거나 사람들에게 식상할정도로 익숙해진, 그러나 사용하면 누구나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이 익숙한데 참 좋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멜로디나 코드 진행을 의미합니다.
집에서 나와 무작위로 실행시킨 노래 중에 하나에 꽂혀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노래만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Downhere의 Don't miss now 라는 노래인데, 처음 시작부터 '아 이건 클리셰다' 할만한 진행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마음이 좀 서글프고 힘든 오늘같은 날엔 나에게 익숙하고 안정감을 주는 클리셰들에게 기대게 되나 봅니다. 저는 좀 아련하고 노을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클리셰를 특히 좋아합니다. 빌로 조엘의 레닌그라드도 그런 곡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클리셰 하나쯤은 있으시겠죠?
노래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Cliche와 Variation (안정과 변화) 사이에서 늘 고민하게 됩니다. 가장 좋은 건 한 곡 안에 그 둘을 적절히 섞는 것이고 사실 모든 노래가 stable과 unstable의 흐름이긴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안정감과 위로를 전달하고 싶고 때로는 불편함과 파격으로 정신이 들게 하고 싶은 것이 만드는 사람의 욕심입니다.
라디오에 소개된 '4등'을 봐야할 영화로 소개하면서 들었던 이유가 이거였습니다. 드라마는 늘 클리셰를 그대로 차용해서 끝나는데, 이 영화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도전을 가하면서도 철저히 주요인물의 감정선을 드러내는 데만 충실하고 중간중간 설명되지 않는 지점들에 대해서는 과감히 연출을 포기하는 점이 오히려 감정선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기에 완성도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클리셰라는 것을 뛰어넘으려 그 반대지점의 변화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어도 클리셰를 넘어설 방법은 있습니다. 안정과 변화가 아닌 제 3의 지점을 정해놓고 달려가면 됩니다. 그 지점 아래에서 클리셰와 변화가 조화를 이룰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결국은 제 3의 지점, 정말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와 그 속에서 안정과 변화를 얼마나 잘 조화시키느냐가 창작물의 완성도를 좌우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더 넓게 생각하면,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클리셰 넘치는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영화이고 음악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겠지만 만드는 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관객의 클리세와 같은 기대를 한 번쯤은 비틀고 벗어나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일상에는 Cliche와 Variation, 드라마와 영화가 촘촘히 얽혀있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