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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05. 2019

올림픽 30주년 KBS 다큐 88/18

미디어

KBS에서 방영한 올림픽 30주년 다큐 88/18 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먼저 형식. 대부분 KBS의 것들로 구성된 자료의 나열은 단순한 나열로 보이지만 화면의 대사가 하나의 주제 안에서 연결되어 있기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직관적으로 그 주제를 파악하게 한다. 흔한 다큐에서처럼 내레이션이 붙지 않아도 마치 사진들의 모음인 모자이크로 거대한 하나의 그림을 만들듯 짜여있다. 여기에, KBS의 적나라한 정권 나팔수 노릇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도 칭찬할만하다.


무엇보다 이 다큐를 시청하는 2018년의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내 예상으로는, 뒤로 가면 갈수록 일종의 거부감 내지 괴리감, 비판하고자 하는 욕구가 희미해져 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프닝을 채우는 전두환 찬양은 대부분 불편해할 것이다. 50대 이후 세대들도 최소한 씁쓸하게 그땐 그랬지 정도의 반응일 것이다.  

경제 성장을 역설하는 장면에서는 그보다는 많은 수가 고개를 끄덕일 가능성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어디선가 울리는 "지금보다 더 성장해야 잘 살 수 있다"는 확성기의 외침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는 작을지라도.


그런 면에서는 허화평이 재미있는 말을 했다. "한국이 언제 뭘 준비해서 한 적 있었느냐? 일단 저질러놓고 달려가지 않았느냐?" 실제로 그랬다. 경제성장도 그랬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됐던 올림픽도 그랬다. 이런 한국 사회의 특징에는 역사적 유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난 그걸 "역사에 의해 상상력을 거세당한 사람들의 비극"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그럼 "가시권 정비 사업"에 대해서는 어떨까? 이쯤에서는 반반으로 갈릴 것 같다. 여전히 재개발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갈등은 사회를 좀먹는 거대한 문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는 문제라는 건 그만큼 문제의 크기와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다큐에서도 이 문제를 비중있게, 직접적으로 다룬다.


"87년 민주화 항쟁"에 대해서는, 그것을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게는 그게 한편으로는 비극적 징후로 읽히기도 한다. 허화평의 말 때문일까, 일단 직선제를 저질러놓고 달리다보니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 외의 다른 길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게 된 세대가 지금의 세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다큐 종반부, 2019년을 그리는 장면이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가벼울 장면. 하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여전히 존재하는 국가, 사회 차원의 거대한 비전에 대한 프로파간다가 지금도 먹히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씁쓸함을 던지는 장면이다. 우리는 과거, 그렇게 배신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미래에 대한 선동에 휘둘리며 때로는 알면서도 기꺼이 믿어준다. 첨단기술, 잘 사는 나라, 선진국 ...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조차 억압당하는 사회체제는 분명 문제지만, 그에 대한 대안이 더 큰 프로파간다에 잠식당하는 것은 더 본질적인 어려움을 야기한다. 전두환에게 사로잡힌 1980년대. 2010년대를 사는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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