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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05. 2019

해방공간의 광장, 2018년의 광장

2018. 9. 17


교과서에 아주 짧게나 소개되었던, "중립국"이란 대사밖에는 기억에 나는 게 없던 최인훈의 <광장>을 이제야 일독했다.


아무리 해방공간이 개인과 역사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로 가득하다고 하지만 그 관계를 이렇게 잡아내어 광장이라는 '유토피아'를 사용해 그 안에서 평범, 어쩌면 가장 불가능한 비범한 행복 을 추구했던 비극적인 영혼을 포착해낸 소설이 있었을까?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 사이에서 검은 물 먹은 좌익놈과 소부르주아 속성을 버리지 못한 반동이란 평가를 들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인간적인 인생을 살아보려고 나름 몸부림쳤던 탓일 것이고, 그랬던 숱한 제 2의 이명준은 이명준만큼 다이나믹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아마 비슷한 갈망과 절망을 타고 흐르다 그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어제 KBS에서 방송된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 88/18은 88년 그 이후로 30년이 지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묻고 있다. 그 다큐의 도입부는 "전두환 찬가"로 채워져 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수구의 찬가와 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분노가 담긴 찬가,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찬가는 닮은 데가 있다. 이름만 바꿔 넣어도 될만큼 비슷한 "믿음들"로 가득한 그 정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민망함을 넘어 소름돋는 진실을 체감하게 한다.


누구나 어딘가에 기대며 광장을 갖기를 원하지만, 인간으로서 사랑 안에서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늘 "위험인물"이 되며, 세상은 그 사랑을 반드시 꺾어버린다는 점이다.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이 죽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나타나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고, 혁명의 새날을 사랑하여 몸을 던진 자들이 죽고 혁명의 새날을 믿으라고 주문을 걸던 자들이 독재를 만들었다.


후반부, 이명준이 그리던 중립국의 삶, 서울에서 태식을 고문하던 그와 남한측 인사의 설득이 꿈인 것으로 처리된 건 상징적이다. 또한 자신을 노려보던 눈길의 정체를 알아버린 것도. 삶의 모든 것이 박살나고 피폐해져버린 끝에야 발견하게 되는 어떤 결론. 자유롭게 숨쉴 광장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죽이지 않을 괴로운 힘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그에게, 이제는 단둘이 나눌 한뼘의 밀실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에게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광장은 움직이지 않는 땅 위에 있는 것이다. 정 선생 댁의 미이라 관, 낙동강 전투에서의 동굴, 월북을 위해 그리고 중립국으로 향하기 위해 사용했던 교통수단인 배, 모두 고정되지 않고 유동하는, 임시적인 거처를 뜻한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부터, 사랑하던 윤애의 집으로부터, 북한의 거처들로부터 서서히 그러나 철저하게 멀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근대의 유동하는 개체를 말한다. 남한에서 태어난 최인훈의 <광장>은 오늘날에도 유령처럼 떠돌며 인간을 사로잡아 유동하는 개체로 만드는 힘센 실체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 글에 끝에 다시 바라본 '광장'이라는 글자에서 2018년을 사는 나는 '촛불 광장'을 읽는다. 그리고 그 광장이 "우상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점점 유동하는 개체들을 광장 밖으로 밀어내며 회색의 액체 근대를 재현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2018년, 바로 <광장>의 저자 최인훈이 타계한 해이다. 그는 몇년 전 그 광장의 촛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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