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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Apr 19. 2019

상식계와 복잡계


인터넷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짤입니다. 제가 살던 시대만 해도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사주의적 개발주의적 정언명령이 공기처럼 떠돌던 시기였는데, 그것을 절묘하게 비틀어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글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짤. 예전에는 "할 수 있도록 하는 용기"만 용인되었지만 오늘날은 그런 분위기를 뒤집는 "못 한다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근 몇 십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상식"은 "하면 된다"였습니다. A를 달성하기 위해 100의 에너지를 투입했는데, 그래도 안되면 100을, 또 100을 투입하다보면 언젠가는 된다는 것이죠. 그 정언명령에 따라 에너지를 쏟아부어 이룬 것이 이른바 "한강의 기적"입니다. 물리법칙으로 따지자면 물체의 에너지를 이동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 일정 정도 이상의 힘(에너지)을 가하면 물체가 이동한다는 것이죠. 뚜렷한 인과관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상식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간 가려지거나 무시되거나 억압당했던 또 하나의 물리법칙인 "작용 / 반작용 법칙"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투입될때마다, 에너지가 빠져나간 만큼 어떤 식으로든 반작용이 일어나는 것이죠. 수많은 노동자가 열악한 조건에서 혹사당하다 때론 죽기도 하고, 가족이 파괴되고,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인권이 유린되고, 갈등이 고착되어 뿌리깊은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할 수 있다"며 해낸 그 과업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받아야 했던 "반작용"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인지, 몇십년간 쌓였던 의문이 때로는 분노로, 우울로, 피로로, 혁명으로,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분출되는 중입니다.




흔히 한국 사회를 경직된 사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때론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혹자는 이를 신기해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 모순이 아닙니다. 그저 "상식계의 모습"의 변화가 드러난 결과일 뿐이죠. 경직된 사회를 만들었던 단순 인과 관계의 상식에 작용/반작용 법칙이라는 또 다른 법칙이 개입하면서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게 나라냐?"고 외쳤던 촛불의 시위를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촛불 시위는 분명 현실적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것은 "상식계의 전복"이나 "복잡계로의 지향"이 아니라 현저하게 낮은 수준의 상식에 대해 "지금 시대가 담지하는 상식계의 정당성에 대한 재확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풀어 말하면, 이명박근혜 정부의 10년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 "하면 된다"는 상식을 바로 그 상식으로 밀어부쳤기 때문에, 이미 작용/반작용 법칙을 몸으로 체감했던, 그러니까 근대화의 피로감을 떠안아야 했던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일정 수준이 넘는 순간 "이게 나라냐?"며 "반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형국이라는 것이죠. 위에 소개한 몇몇 짤들,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문화 콘텐츠의 내용을 보면 바로 이러한 "반작용"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잠시 쉬어가라는 위로가 아니라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 이미 임계점을 넘어버린 사람들에게는 후자의 위로가 더 위로답게 느껴지는 것이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새로운 바람이 부는가 했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새로운 상식계"의 상식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제정책, 노동정책에서 이러한 문제는 두드러지는데,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작용/반작용 법칙"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고강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이들의 이야기,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이 하루가 멀다 않고 들려 옵니다. 이는 단지 정부의 실책으로 야기된 문제만은 아닙니다. 사회 전반이 여전히 새로운 상식에 대한 "반작용"에 시달리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런데 "상식계"는 결코 혼자 작용하지 않습니다. 늘 "복잡계"와 상호작용합니다. 인지언어학자이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프레임' 논쟁으로 유명한 조지 레이코프의 언어를 빌리면 '직접적 인과관계'의 세계가 상식계, '유기적 인과관계'의 세계가 복잡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 최저임금 인상이 순수한 당위라고 생각하지만, 최저임금이 인상되는 순간 개인사업자(자영업자)들은 알바의 급여를 감당할 수 없어 기존의 인력조차 해고하게 되고 그로 인해 실업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최저임금의 상승폭보다 본사의 착취가 더 문제임에도 자중지란을 일으켜 문제의 본질은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죠. "복잡계"를, 유기적 인과관계를 고려해야만 이런 문제에 접근하여 제대로 된 해답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에 대한 혐오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현재 노동자들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반작용"입니다. 재벌을 비롯해 무능력한 경영자가 기업을 어렵게 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목격하면서도, 노동자는 여전히 파업을 하면 안 되는 존재, 좀 더 희생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이미 극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 "반작용"을 겪고 있어 그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투쟁을 하는 것 뿐인데 말입니다. 정말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경영자에게 있는데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상식계에는 힘을 가하는 주체는 경영자, 힘을 공급하는 대상은 노동자라는 이미지가 뚜렷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또한 문제를 좀 더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분석하는 "복잡계"를 고려할 때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분간 한국 사회는 "운동 법칙과 작용/반작용 법칙이 공존하는" 상식계와, 우리로서는 아직 미지의 영역인 "복잡계"를 모두 경험하게 될 겁니다. 국민 대다수는 상식계조차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 여전히 분노하는 동시에 지쳐가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복잡계와의 상호작용까지 고려한 대안이 나타나야 하건만 현재까지의 모습으로 볼 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모두 이를 감당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노동자의 투쟁도, 페미니즘 운동도, 농민들의 절규도, 그 어떤 움직임도 원인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에 따른 반작용도 발생하지요. 경영자의 압박, 백래시, 당사자들이 느끼는 좌절과 피로, 세상을 좀 더 인간적인 곳으로 바꾸려 모색하는 모든 움직임에도 여지없이 법칙들은 작용합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좀 더 상식적인 면면이 고려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복잡계를 탐구하여 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면 된다"는 법칙만 존재했던 이전의 상식계에 "작용 반작용 법칙"을 밀어넣는 데만 해도 엄청난 반작용을 겪어야 했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반작용들에 시달리게 되겠지요. 적어도 몇 십년 동안 지금의 상식계를 구현하기 위해 복잡계를 차용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 사회에, 이전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대안들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쨌든 인간이기에, 더 이상 물리 법칙에만 좌우되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새로운 상식이 되어야 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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