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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Apr 11. 2019

지뢰찾기

정권은 바뀌었지만 사회의 본질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되새겨야 할 것 같은 요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판정이 있었으나 제대로 된 제도의 정착을 위해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비단 낙태죄 이슈의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개혁을 위임하기 위해 세운 정권, 그들을 지지한 시민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2년 전의 글을 통해 무거운 마음으로 들여다 봅니다.


2017.2.26


정말 오랜만에 촛불집회에 나갔다. 17차 집회였다. 마지막으로 나갔던 집회에서는 시청광장까지 인파가 밀려서 어릴 적 새해 타종할 때 보신각 갔던 이후로 처음으로 죽을 뻔 했는데, 오늘은 시청역에서 내리니 그간 보이지 않았던 태극기와 노인들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시청과 광화문 사이에 경찰 차벽이 쳐져 있었다.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 사이의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역을 벗어나자마자 뒤에선 태극기 집회, 앞에선 촛불 집회의 소리가 충돌해서 정신을 빼앗았다. 지인을 찾으러 촛불 집회 현장을 헤매다 잠시 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는, 여기 더 있다간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좀 이른 시간이지만 집에 가기로 했다. (허클베리 핀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은 건 오랜만에 간 집회에서 누린 행운이었다.) 시청쪽으로 걸어가는데 마침 집회에서 삼성 얘기를 했고, 갑자기 뒤에서 한 할배의 말이 들렸다.

"삼성 아니면 우리 먹고 살지도 못 해!"

순간 머릿속에서 숱한 말들과 행동들이 생각났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저 분들을 비롯해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많은 분들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가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성 때문에 먹고 산다고 믿고, 박근혜를 탄핵하려는 세력이 종북좌파라는 주장은 성장제일 재벌우선주의, 반공주의라는 낡은 시대의 이념과 가치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부분의 한국 사회 구성원이 알게 되었다.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 인원의 차이, 그리고 탄핵에 대한 압도적인 여론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저들의 주장이 결코 사실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분노와 동정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토요일에는 촛불을 들고 일상에서는 탄핵 인용을 소망한다.

혹시 '지뢰찾기'라는 게임을 아는가? 마이크로 소프트 사의 OS인 '윈도우'에 기본 내장되어 있는 게임인데, 제한된 필드에서 칸을 열어가면서 그 안에 숨겨진 지뢰를 찾는 게임이다.마우스 왼쪽 클릭으로는 칸을 열고, 오른쪽 클릭으로는 지뢰 표시를 하거나 물음표 표시를 할 수 있다.


 이 게임의 특징은 첫 번째 클릭에서는 무작정 아무 곳이나 눌러야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 칸이 지뢰가 아닌 이상 일정한 공간이 펼쳐지고 폭탄이 있는 주위 칸에 숫자들이 나타난다는 데 있다. 플레이어는 그 숫자를 보고 주변 어느 칸에 지뢰가 있을지 추리하며 게임을 진행해 나간다.


한국 사회를 지뢰찾기 게임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이제 최순실과 박근혜 덕분에(?)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반공주의, 그에 더하여 독재체제라는 지뢰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되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촛불로 길을 밝혀 지뢰를 골라내면 아마 그 근처에 있던 대부분의 지뢰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지뢰찾기가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임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커다란 판을 가지고 있었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지역에서 숫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새로운 판을 확인시켜주는 단 한번의 클릭은 바로, 2016년 5월 17일 강남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었다.

누군가는 의아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와 같은 대형참사가 있었는데 왜 그 살인사건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앞서 설명했듯 세월호는 그간 한국사회에 쌓인 적폐가 빚어낸 대형참사이자,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밝혀지기 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정체모를 불안감과 경각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낡은 시대의 이념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그러나 강남역 살인사건은 이제 앞으로 우리가 제거해야 할 또다른 적폐가 엄존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바로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알아보아야 할 새로운 판이다.

한국사회를 비롯해 세계가 주목할 만큼 수면 위로 떠오른 화두는 바로 '배제와 혐오'의 문제이다. 이슬람에 대한 혐오, 인종에 대한 혐오 등이 얽혀 만들어내는 문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수준의 국제 문제로 비화되거나 그것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은 '배제와 혐오'의 진정한 원인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의 가해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정서(문화) 속에 숨겨진 '가해자들, 배제와 혐오의 수행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각국의 투쟁가들, 깨어 있는 사람들은 이 배제와 혐오의 문제가 미시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임을 깨닫고 발빠르고 치열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한국 사회는 똑같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그 출발이 늦은 셈이다. 그간 쌓인 적폐가 다 해결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여러가지 이유에서 '배제와 혐오' 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2016년 5월 17일의 강남역 살인사건은 한국 사회에, 배제당하고 혐오받는 이들, 여성과 성소수자와 장애인과 노숙인 등이 처한 사회적 조건과 그들의 목소리를 일상의 표면으로 가져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상징적으로 온라인상에서는 이전의 '일베 논쟁'에 이어 '메갈 논쟁'이 격화되었다. 일베 논쟁이 구 시대의 적폐에 해당한다면 메갈 논쟁은 새로이 드러난 적폐에 해당할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과 논쟁을 통해 우리는 촛불을 든 이들 중에도 '지뢰'가 있음을 깨닫고 있다. DJ DOC의 '미스박'이 공연되지 못하고 중식이밴드가 공연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었을 때, 촛불을 든 이들 속에서 자신이 적폐를 지닌 지뢰임을 드러내는 이들이 나타났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지뢰임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몇십년을 당하고 살아왔으면서도 어쩌면 이제는 뒤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세계"에 살아가는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비록 지금은 촛불을 들고 구 시대의 적폐를 청산하자 외치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로 그 자신이 구 시대의 적폐가 되어 언젠가 "남성혐오를 멈추라"며 허옇게 센 머리를 휘날리며 광장 한 켠에 앉아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이들이, 지금 우리가 함께 숨쉬는 광장에 있다는 말이다.


 한 정치인이 지난 대선에 출마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했다가 이번에 말을 바꾸었을 때, 항의하는 이들에게 "나중에"를 외쳤던 바로 그 사람들이 "나중에" 무엇이 되어 살아갈지 생각해 보아야 할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다행이라면 한 번 지뢰로 지정되면 바꿀 수 없는 지뢰찾기 게임과는 달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지뢰임을 깨닫는다면 제거당하지 않을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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