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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14. 2019

헛심쓰기

운동 practise 이나 싸움, 전쟁 등등에서 사용되는 전략 중 '헛심쓰게 하기'가 있습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헛손질을 하게 만들어서 진을 빼고 나아가 교란시키는 작전이죠. 스페인 내전을 다룬 명저이자 최종 정리서로 평가받는 <스페인 내전>에서는 공화군이 시종일관 헛심을 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장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병력을 오직 스페인 특유의 돌격과 허세 문화에 의지해 낭비하고 헛심을 쓰다가 결국 패망을 맞이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진지전, 장기전, 게릴라전으로 자신의 힘은 온존하며 상대의 힘을 빼는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다 내부 분열로 그야말로 '헛심쓰기의 완전판'을 보여주는 공화국 정부가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가까운 예를 찾아볼까요? 위의 기사를 봅시다.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유출되는 지하수, 1급수 정도 되는 지하수가 그냥 버려지고 있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지만 이용률은 30% 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마치 국내 인재가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자 대거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이랄까요? 지하철 공사로 인해 지하수가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고, 교과과정을 통해 막대한 투자로 키워낸 인재가 기업이나 사회의 문제 때문에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굉장히 멋지고 누구나 동의할 만한 법안이 통과되어 발효되었다고 해 보죠. 그런데 그 법안을 지지할만한 다른 법안이 갖춰지지 않아서 무용지물이 되고, 그걸 두고 그 법안 자체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며 폐기하자고 달려드는 경우입니다. 법안이 문제가 아니라 법안이 '낭비'되고 '유출'되며 '헛심쓰게 만드는' 상황이 문제인데요.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이렇게 해서 그 법안이 무용하다며 폐기되고 다시는 그 방향으로는 법안을 만들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실제로 그런 경우가 꽤 될 겁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한 운동의 영역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죠. 멋진 비전과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내부에서의 사적인 관계의 삐걱임이 비전과 지향이라는 외피를 입고 갈등을 빚으면 마치 그것들이 본질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양 되어버려 조직이 와해되고 나서 누구도 그 조직이 내걸었던 비전과 지향을 따라가지 않으려 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낭비와 유출, 헛심쓰기 현상이 여기서도 벌어지는 것이죠.


세상을 보는 데 있어서 저의 관심사는 여기에 있습니다. 다이나믹한 혁명을 꿈꾸고 권력관계를 뒤엎을 거대한 에너지의 응축과 발현도 좋습니다만 그런 것들조차 단 한번의 낭비와 유출, 헛심쓰기로 순식간에 사상누각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었던 2016~17년의 촛불이 그 좋은 예가 아닌가요? 그 촛불이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지만 그 후로 일상을 바꾸었나요? 촛불을 들었던 힘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지금 촛불의 힘을 낭비하고 유출시키며 헛심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요?


저는 "비폭력저항운동"에 관심이 많은데, 그 이유가 바로 헛심쓰기에 대한 저의 관심입니다. 사울 알린스키로 대변되는 조직가와 오로지 민중의 변혁적 에너지로 비폭력운동을 주도하는 이들 - 예를 들면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 두 부류로 나눠지는 것이 이 운동의 판세인데, 두 극단을 피해서 유기적으로 조합하려는 이들이 쓴 책이 <21세기 시민혁명>입니다. 이 책은 조직이든 민중의 다이나믹한 모임이든 내부분열과 자중지란을 막고, 목표한 바를 이룬 뒤에 후속적인 조치로서 혁명 에너지를 어떻게 끌어갈지를 이야기합니다. 제 표현대로라면 헛심쓰는 걸 방지하자는 게 중요한 포인트죠. 


조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 언급한 대로, 조직의 문제가 가치지향의 충돌로 생긴 것인지 사적인 감정에 의해 생긴 것인지 등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꽤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한 사안이고 비폭력저항과 관련한 민주적 조직 만들기 도구는 이를 도와줍니다. 내부의 권력관계, 구조, 정서 등을 모두 들여다보게 해주죠. 이를 통해 문제를 좀 더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작은 감정 싸움이 큰 불로 번져 헛심만 쓰고 번-아웃 되는 참사를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몇 년간 이런 저런 판(?)에서 구른 결과, 이런 식의 헛심쓰기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무너지는 조직과 운동을 숱하게 많이 봐 왔습니다. 좁은 판에 있다보니 이미 인간적으로 관계가 틀어진 후에도 계속 만나야 하고, 그러다 보면 문제가 재발해서 불이 옮겨붙듯 다른 조직이나 운동에도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됩니다. 저는 그게 싫습니다. 전체를 위하자, 대의를 지키자는 고루한 헛소리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헛심쓰기가 계속되면 지금 살아 숨쉬며 존재를 걸고 투신하는 개개인을 '말려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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