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엔틸드 Dec 12. 2019

주술사회

유물발굴

2015. 11. 17 작성됨.


"주술에서는 특별히 강력한 신념과 욕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설사 효력을 수반하지 않는 경우일지라도 신념의 동요를 초래하지 않는다. 예컨대, 그때의 의식(儀式)이 올바르게 행해지지 않았다든가, 그 주술에 대하여 더욱 강력한 대항주술(對抗呪術)이 작용했다든가 하는 일종의 변명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주술은 몇 개의 형태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른바 공감적인 주술이 근본이고 이를 모방(또는 유감)주술과 감염(또는 접촉)주술로 대별할 수 있다. 모방주술이란 어떤 동작을 바르게 흉내내면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이다. 닮은 것이 닮은 것을 낳고, 흉내내면 일이 그대로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말하자면 비를 내리게 하는 의식을 행하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고 믿는 것이다. 감염주술이란 어떤 부분에 대한 작용이 전체에 대하여 같은 효과를 초래한다는 신념이다. 이를테면, 머리카락이나 의류 등 인체의 일부, 또는 인체에 접촉한 것을 입수함으로써 그 사람의 영혼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어떤 작용을 가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미운 상대의 사진을 바늘로 찌름으로써 그에게 고통을 준다고 생각한다든가, 병자의 옷에 기도하게 한 다음 그 옷을 입히면 병이 낫는다고 믿는 일 따위가 그런 예이다...."

- 나무위키 "주술" 항목  


예로부터 주술은 그 자체로 무서운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설사 효력이 없어도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나무위키의 설명은 재미있습니다. 어떤 종교의 정신승리적 측면을 발견하게 되는 듯 합니다.  


한국사회가 주술에 걸린지 반세기가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 주술의 효과가 다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강고한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술을 가능케하는 신념의 체계와 내용을 연구하는 것, 특히 전쟁과 독재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이들이 어떻게 그 주술을 내재화하는지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경찰의 차벽에 막힌 것 같은 지금의 답보상태를 벗어나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추측건대 권력자들은 믿지 않는 혹은 이용하는 '대한민국'이라는 허상이 지탱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축은 역시 경제적 불안입니다. 이는 심리적 불안과 연계되어, '자신들의 허상 속 대한민국'이 무너지면 지금 겪는 경제적 불안을 버텨낼 기둥을 잃을 것 같은 불안감이 작용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대한민국을 위해 있지도 않은 - 혹은 실상과는 전혀 다른 - 적인 종북을 만들고 낙인찍어 자신들의 신념을 정당화하고 버팀목으로 삼는 것입니다.  


얼마전 벌어졌던 '민중총궐기' 시위에서의 경찰의 폭력진압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서도 한국사회가 얼마나 신앙깊은(!) 주술사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늘 그래왔듯 시민의 정당한 권리인 시위는 특별히 그 날 논술고사를 치는 고등학생들에게 교통불편을 초래하고 대치하는 경찰에 과격한 행동을 했던 폭도들이 넘쳐났던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금새 들통이 났지만, 이미 주술에 진하게 걸려있는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주술의 인도를 따릅니다. 사회가 안정을 잃어갈수록 주술에 기대려는 사람들과 그 허상을 폭로하려는 사람들간의 갈등은 심화될 것이고 그 사이에서 흐뭇해하는 건 제사장들(!)뿐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술에 걸려있다는 폭로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 주술에는 모방주술과 감염주술이 있습니다. 이를 이 사회에 맞는 대로 번역해놓으면, 모방주술은 부자들이나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면 나도 저렇게 되리라는 주술입니다. 감염주술은 부자들과 성공한 사람들이 속한 영역에 들어가면 자신도 그리 될 수 있다는 주술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사회는 그조차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이쯤이면 주술의 허상을 깨달을만도 한데, 인용문의 첫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 책임을 주술이 아닌 자신에게 돌립니다. 노오오력이 없었다든가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종북정권이 들어섰다는 식으로 합리화합니다.  


한국은 분명 주술사회입니다. 이 주술 자체를 부정하고 깨버릴 것인가, 다른 주술을 선택할 것인가는 말 그대로 선택의 영역이지 옳고 그름을 말할 영역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뭔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나중에 주술의 실체를 깨닫고 분노로 무장한 대중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한다해도 소용없을 것이고 이 사회는 거대한 분노와 증오의 소용돌이에 휩싸여버릴 것입니다. 주술사회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의 테러, 프랑스의 저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