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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8. 2019

스토브리그가 쏘아올린 작은 박탈감


저는 요즘 SBS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야구장에서 그만 20년간 잃어버렸던 엘린이의 영혼을 찾아버려서 말이지요...물론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괜찮은 드라마입니다. 야구의 정규 시즌이 끝나고 전력강화를 위해 프런트와 구단 운영진이 동분서주하는 기간을 스토브리그라고 하는데, 그 겨울 기간동안 야구 팬들이 난롯가(=스토브)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운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오늘 방영된 5화에서는 꽤 흥미로운 소재를 다뤘습니다. 이른바, 스포츠 선수들의 병역기피 논란이었는데요, 등장인물인 길창주 선수는 청소년대회와 국가대표 투수로 맹활약한 바 있었지만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후 귀화해 병역기피 논란에 휩싸입니다. 물론 그에게는 단순 병역기피 목적이 아니라 아내를 둘러싼 말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사정을 대중에게 알리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극중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남에게 박탈감을 줘 놓고서, 좋아하는 일로 속죄를 한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모두 아시다시피 한국은 징병제 국가입니다.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로 국방의 의무가 들어가지요.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국군 창군 이래, 아니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징병거부(병역기피)는 존재해 왔습니다. 사실상 군대의 존재와 역사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현대의 많은 국가들이 모병제를 택하면서 병역을 '의무'로 지지 않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한국이 징병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은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북한과의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니, 적정 규모의 군사규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보니 한국 사회에 속한 대다수의 "남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군대를 경험합니다. 억지로 말입니다.


저도 병역의 의무를 이행했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군대에 2년 동안 끌려갔습니다. 아직도 입대일 직전에 느껴졌던 그 감정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지옥에 들어가는 심정, 답답하고 막막하고...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게 죽음뿐인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한국 땅에 살면 군대도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구나, 왜 우리 부모는 재벌도 정치인도 아니라서 내가...뭐 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생각도 했습니다. 


요즘도 가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저는 여러 이유로 군면제가 된 사람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줍니다. 부럽다는 감정은 생기지 않습니다. 어차피 저에게는 지나간 일이니까요. 대신, 그 자리에 군대를 앞둔 사람이 있다면 가능하면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해 줍니다. 그것은 축복이라고요.




제가 이런 입장을 갖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제 군대 경험입니다. 저는 1년은 일반적인 형태의 부대에서 소총수 - 육군에서 가장 흔한 보직입니다. - 를 했고, 나머지 1년은 GOP에서 군종병 보직으로 근무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군종이 된 저에게 "땡보"라고 했지만, 저는 "흔한" 소총수와 "땡보" 군종병을 모두 경험하며, 군대가 저에게 가하는 신체적 정신적 폭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나마 제가 군생활을 했을 때는 군대 내 구타 및 가혹행위가 근절되던 시기였고, 부대의 위치나 특성상 이른바 "똥군기"가 있는 곳은 아니어서 큰 문제 없이 군생활을 마칠 수 있었지만, 강도만 다를 뿐 군대에서 겪을 수 있는 이런 저런 불합리와 인권 침해는 모두 겪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군대에서 "사회에 나와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배웠다"고들 하던데, 아무리 떠올려도 군대에서 보고 배우게 되는 것들은 상관에게 아부하고 후임은 쥐어짜며, 비합리적이고 생산적이지 못한 규율로 권위를 세우고, "술과 여자"로 대표되는 K-패치된 비즈니스 방법 뿐이었습니다. 뭐, 누군가는 정말 그게 사회에 나와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가 각종 부정부패와 갑질로 얼룩진 모습을 보면, "병영사회"로부터 만들어진 것들이 이 사회를 망쳤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군대는 한국사회의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저는 인간은 감옥이든 군대든 그 어디에서는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인권은 타인의 인권 또한 보장받을 수 있을 때 유효한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적군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둘째 치고, 자군을 인격체로 대우하지도 못하는 군대가 군인에게서 어떤 전투력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불확실해서 일사불란하고 민첩한 대응이 필수적인 전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논리적인 운영과 합리적인 판단, 그리고 아군끼리의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나요? 하지만 이러한 것을 지향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 군대는 말 그대로 "당나라군대"가 되고 맙니다. 봄의 벚꽃마냥 철마다 터져나오는 군 관련 비리, 그것이 보여주는 한국군의 수준, 그런 것들이 "병역기피"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셋째, 저는 군대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간의 관계를 해치기 때문이지요. 군대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집단입니다. 저는 그 정당화는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병역기피 논란을 받는 병역거부 또한 찬성하고,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뉴스를 보니 부족하지만 드디어 한국에도 대체복무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하더군요. (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22366.html ) 작지만 의미있는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민족, 그 외 수 많은 경계들이 인류를 가로막고 폭력을 부추기지만, 결국 그것을 바꿔내는 길로 가야한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보며 제 뇌리를 때렸던 건, 그래서 마음이 복잡하게 만들었던 건, 길창주의 저 대사였습니다. "남에게 박탈감을 줘 놓고서..." 여전히 스포츠 선수에 대한 병역혜택이 논란이 된다는 것, 그리고 스티븐 유 (한국명 유승준)가 한국에 발을 딛지 못하는 것,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국민적 정서에는 바로 "박탈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남자들이 징병제의 필요를 말하며 내미는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국민의 의무"같은 것은 다 핑계일 뿐입니다. 드라마 끝부분에서 한 여기자가 던진 "지금이라도 다시 군대에 갈 생각은 없나요?"라는 질문에 야구 커뮤니티의 남성들이 "여자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게 맞냐?"는 반응을 보인 것도, 남자들이 군대 얘기 축구 얘기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부터 시작해서 북한군 시체를 봤다는 둥, 저 산에 있는 참호는 모두 내가 판 거라는 둥 이런 저런 뻥카를 날리는 것도, 이스라엘군은 여자도 징병 대상인데 왜 한국 여자는 군대 안 가느냐고 억지를 부리는 것도, 모두 한국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그 박탈감 때문입니다.


누구나 군대에 가는 것을 꺼리지만, 가야합니다. 그래서 가기 싫습니다. 군대에서 다양하게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경험을 합니다. 다시 사회에 복귀하면, 그래도 사회는 군대보다는 살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2년여의 군생활은 참 많은 기회비용을 앗아갔습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무엇을 위해 바친 2년의 시간은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박탈감은 사실, 이미 군대에서부터 자라납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군생활이지만 거기도 사람사는 곳이라고, 나름의 굴곡이 있습니다. 신병일 때는 혼도 많이 나고 늘 당하는 위치에 있지만, 시간이 지나 계급이 높아질수록 권리도 권력도 차오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 저도 마찬가지로 - 여지없이 걸려드는 것이 "보상심리"입니다. 보상심리는 박탈감에서 기인합니다. 빼앗긴 것이 있어야 보상받을 무언가를 찾게 되지요. 군대에서 악습이 유지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한 가지가 바로 보상심리입니다. 내가 당했으니 네가 당해라, 그래야만 이 억울한 2년의 시간이 조금은 덜 아깝게 느껴질 것 같다 라는 것이지요.


한국 사회는 단 한 순간도 남성 일반이 가지는 박탈감과 보상심리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시도는 했지요. 군 가산점제를 도입하기도 했고, 전역 시 원활한 사회복귀를 돕기 위한 이런 저런 제도들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군 가산점제 하나만 해도, "모두가 당연히 이행하는 의무를 이행했을 뿐인데, 그것으로 왜 가산점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반론에 바로 무딪치게 됩니다. 국민의 4대의무인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모두 이행할 경우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점들이 있지만 오직 하나, 국방의 의무만은 끊임없는 네거티브 피드백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습니다.


물론 저는 "보아라, 이렇게 병역을 마친 한국의 남성들은 군대가 준 박탈감과 보상심리에 시달리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이들에게 한남이니 기득권자니 그런 말도 안되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과도 한참 벗어나 있고, 저런 입장은 부정적인 되먹임 속에서 끊임없이 헤매며 자신을 깎아먹을 뿐입니다. 저의 관심은 이러한 네거티브 피드백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에 있습니다.




모병제를 하든, 군내 인권을 개선하든, 장성급 군 관련 비리를 없애든, 이 모든 일의 초점은 박탈감과 보상심리가 초래하는 네거티브 피드백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설령 지금의 군 제도가 그대로 유지된다 하더라도,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군대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병역미(비)이행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한국 사회는 꽤나 의미있는 변화를 맞이할 겁니다.


어차피 어떤 답변을 제시하려 시작한 글도 아니었고, 야구 드라마를 보다가 쓰게된 것이니 그와 관련된 질문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야구 선수들이 자주 연루되는 범죄가 도박, 음주운전, 그리고 병역기피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큰 잘못인지, 그리고 한 번이라도 우리 사회가 병역의 의무와 병역기피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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