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 #1
캐나다 출신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 1917-2014)은 정치를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를 권위적으로 분배하는 과정
그런데 이스턴의 정의를 읽고 나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둘째, 권위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미국의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 1902-1978)이 제시한 '인간에게 핵심적인 여덟 가지 가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권력, 부, 복지, 애정(=사랑), 존경, 염결(=깨끗함), 지식, 기술
체코의 정치학자 칼 도이치(Karl Deutsch, 1912-1992)는 라스웰이 제시한 여덟 가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적인 가치로 아래 두 가지를 제시했다.
자유와 안전
라스웰과 도이치로부터 얻은 힌트를 종합하면, 인간은 자유와 안전을 바탕으로 권력, 부, 복지, 사랑, 존경, 깨끗함, 지식과 기술을 주로 추구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알았으니 이제 두 번째 질문의 답도 찾아보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보통 언제 '권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지 떠올리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흔히 어떤 지시가 정당하면서도 강제력이 있을 때 '권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권위는 정당성과 강제력을 동시에 확보할 때 발생한다.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종합해 이스턴의 정의를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인간이 "자유와 안전을 토대로" 추구하는 "핵심" 가치를 "강제로, 그러나 정당하게" 분배하는 과정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정치의 정의였다. 그렇다면 국제정치의 정의는 무엇일까? 이스턴의 정의를 국제정치를 설명할 때에도 활용할 수 있을까? 이스턴의 정의를 살짝 비틀어 아래와 같이 써보자.
국제정치란 개별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를 권위적으로 분배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썼을 때 떠오르는 두 가지 의문.
첫째, 개별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둘째, 국제정치에서 무엇을 권위라고 할 수 있는가?
개별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자유와 안전의 위상이 국제정치 환경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개인에게 자유와 안전이 수단적인 가치라고 설명했다. 국가 단위에서 자유와 안전의 위상은 급격히 높아진다. 개별 국가에게 자유와 안전은 가장 핵심적인 가치, 즉 사활적 이익에 해당한다. 사활적 이익이란 생존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는 이익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와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생존할 수 없다.
자유롭고 안전한 국가들이 즐비한 국제사회에서 국가들의 행동을 강제하는 정당한 권력, 다시 말해 권위를 찾는 것은 달이나 화성에서 생명체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달이나 화성에 생명체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인간은 외계 생명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행위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아직 인간은 그러한 행위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주류 국제정치이론인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는 각자의 방식으로 국제사회에서 권위를 찾고자 노력한다.
현실주의는 권위의 '강제성'에 초점을 맞춘다. 현실주의에서 말하는 강제성은 '폭력'과 직결된다. 국제사회에서 폭력이 나타나는 양상은 국지적인 갈등에서부터 대규모 전쟁에까지 이른다. 현실주의는 국제사회를 국가들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전쟁을 펼치는 혼돈의 장으로 보고, 폭력을 곧 권위로 본다. 따라서 국가가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와 안전이라는 사활적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야 한다.
이상주의는 권위의 '정당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상주의에서 말하는 정당성은 '국가 간의 화합과 연대'에서 나타난다. 이상주의는 국가 간의 화합과 연대를 국제법과 국제기구가 가지는 힘의 원천으로 본다. 국가들이 국제사회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조율할 권리를 국제법과 국제기구에 부여할 때 정당성이 생긴다고 본다. 일부 이상주의자는 화합과 연대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갈등을 없애고 세계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제사회는 현실주의에서 말하는 '혼돈의 장'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국제사회는 무정부성 혹은 무정부적인 상태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정치에서 말하는 권위의 유력한 후보자는 폭력이다. 그러나 화합과 연대에서 정당성을 찾고, 정당성에서 권위를 찾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많은 협약과 조약, 국제기구가 화합과 연대를 통해 탄생했다. 그러므로 폭력과 권위를 동의어로 여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무정부성이란 말 그대로 '무정부 상태'이며, 무정부적인 상태란 무정부 상태에 가까우나 최소한의 질서와 체계가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에서 개별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에 관해 더 이야기해 보자. 앞에서 개별 국가에게 자유와 안전은 사활적 이익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사활적 이익을 확보한 국가들은 더 이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개별 국가들은 보통 영토와 돈, 자원과 같은 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비물질적이고 정서적인 가치는 뒤로 밀린다. 그러나 최근 소프트 파워(Soft Power)라는 개념이 대두하여 개별 국가들이 매력과 같은 비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물질적인 가치가 지닌 위상이 비물질적인 가치에 비해 높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치는 보통 희소하다. 물질적인 가치가 희소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비물질적인 가치 또한 희소할 수 있다. 비물질적인 가치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양을 가지거나,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정치에서 다루는 개별 국가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곧 희소한 무언가를 의미한다.
이제 정리해 보자. 국제정치란 무엇인가?
'자유'와 '안전'이라는 사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국가들에게 '희소한 무언가'를 '폭력' 또는 '화합과 연대'를 통해 분배하는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