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 #6
근대 국제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은?
많은 사람이 이러한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이후!
딩동댕!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이후 근대적인 국제체제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주류의 시각이다. 그런데 사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이후'라는 시점은
"유럽에서" 근대 국제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
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유럽에서 베스트팔렌 체제가 등장했을 때, 동아시아에는 중국과 한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국제체제가 잘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아시아만의 독특한 국제체제를 오늘날 '조공-책봉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시스템은 이른바 '중화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체제이다. '진'의 왕 영정이 '시황제'로 등극하면서 중국은 동아시아 유일의 제국이 되었다. 시황제 이래로 중국의 황제들은 '옥황상제의 아들'을 자처하며 스스로 '천자'라 칭했다. 이 천자국을 중심으로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은 모두 '신하'가 되었다. 그 결과 중국 주변의 국가들은 중국을 상대로 조공의 예를 지켜야 했다. 조공의 예란 신하가 직접 군주가 거처하는 곳을 찾아 군주에게 인사를 올리는 '조례'와 신하가 군주에게 진귀한 선물을 진상하는 '공물'의 예가 합쳐진 말로 신하가 군주에게 행해야 하는 갖가지 예절을 의미한다. 중국 주변의 국가들, 즉 한반도,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 국가들의 군주들은 사절을 보내 중국의 황제에게 인사하고 선물을 바쳐야 했다. 중국의 황제는 조공의 예를 잘 지키는 국가들에 책봉을 행했다. 책봉이란 황제가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황제의 권력이 닿지 않는 지방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과 그에 상응하는 관직을 내리는 절차를 의미한다. 중국의 황제는 주변 국가들의 군주를 책봉하여 자신이 천하의 통치자이고, 천하가 중국의 지방에 불과함을 보였다. 물론 이러한 절차는 형식적인 것으로,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주변국의 군주가 군주가 아니게 되거나 주변국이 국가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책봉은 중국에게나, 중국의 주변국들에게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혹자는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시스템이 중국에 권력이 집중된 불평등하고 기이한 체제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조공-책봉 시스템 안에 녹아듦으로써 중국의 주변 국가들도 얻는 이익이 많았다.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조공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었다.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학문과 농업을 숭상하고 공업과 상업을 괄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국제무역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국제무역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이익이 막대하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고 밀무역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무역 루트를 뚫으려 애썼다. 그들에게 조공을 위해 사절단이 중국으로 향한다는 소식은 곧 천재일우의 기회와 같았다. 사절단에 합류한 상인들은 온갖 생필품과 사치품을 가득 싣고 중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것들을 팔아 많은 이윤을 남겼다. 상인들은 귀국해서는 중국에서 사온 생필품과 사치품을 팔아 또 이윤을 남겼다. 조공은 국제무역과 같은 역할을 했다. 또 조공에는 아주 특이한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주변 국가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바로 '사대자소의 원칙'이다. 유교 사상에 따라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충심과 존경심으로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자비와 사랑으로 대하여야' 했다. 따라서 큰 나라는 반드시 작은 나라가 바친 선물보다 더 많은 양의 답례품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자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갖은 이유를 대며 조공 사절단을 보내려 했다. 중국은 갖은 이유를 대며 조공 사절단을 받지 않으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사절단을 한 번이라도 더 보내려는 조선과 괜찮다는 중국 사이의 눈치게임(?)이 드러나는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중국이 주변 국가들은 책봉을 통해 정치적인 이익을 얻기도 했다.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형식적이기는 하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반드시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중국 황제의 책봉이 정당성의 증거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무너뜨려도,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도, 첫째 아들이 아닌 막내 아들을 왕세자로 세워도, 중국 황제의 책봉만 받아낸다면 만사가 OK였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조 이성계가 명의 황제 주원장에게 자신을 새 왕조의 국왕으로 책봉해줄 것과 '화령'과 '조선' 중 하나를 나라 이름으로 골라줄 것을 요청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주원장이 뜸을 들이자 이성계가 조급해하는 모습도 그려지는데, 이는 이성계가 중국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자신과 자신이 세운 새로운 왕조가 가지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중국 황제에게 몇 번이나 책봉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점 또한 책봉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증거이다. 조선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은 중국 황제의 책봉이 늦어지거나 책봉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사절단을 보내 끊임 없이 책봉해줄 것을 요청했다. 중국과 조선의 관리들이 담판을 지어 도출한 합의안대로 책봉이 이루어지거나 지친 중국의 황제가 조선 관리들의 요청대로 책봉해주는 장면은 뻔한 레퍼토리이다. 이론상 책봉은 황제의 권한이니, 황제가 책봉하기를 거부한 건에 대해서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타당해 보이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는 책봉이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중국의 주변 국가들에게 책봉은 정치적으로 꽤나 중요한 인증서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조공-책봉 시스템은 19세기 말엽 와해되었다. 중국은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과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패배했고 동아시아에 유럽식 국제질서가 유입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일본은 새로운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고, 조선도 생존을 위해 변화를 택했다. 동남아시아 등지의 국가들은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기나긴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퇴장이었지만, 조공-책봉 시스템만의 독특함은 오늘날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조공-책봉 시스템 안에서 '세력 균형'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세력 균형의 논리란 둘 이상의 패권국과 각각을 지지하는 국가들이 이루는 세력 간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때 평화가 유지된다고 보는 것으로 미소 냉전 시대와 미중 전략 경쟁 시대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키워드이다. 그런데 조공-책봉 시스템 아래에서 세력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는 모두 전쟁으로 이어졌다. 수, 당(중국)과 고구려, 발해(한반도)가 갈등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힘의 불균형이 유지되는 시기는 평화로웠다. 원이나 청과 같은 유목민족이 세운 중화 제국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를 떠올려보라. 오히려 평화로웠다. 이렇듯 조공-책봉 시스템은 오늘날의 주류 국제정치이론으로 설명하기 까다로운, 묘하게 매력적인 지점들이 있다.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고유한 국제체제인 조공-책봉 시스템에 관해 알아보았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것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기 이전, 유럽의 국제체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후술하겠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 이후 등장한 베스트팔렌 체제가 가지는 가장 큰 의의 중 하나는 개별 국가(당시 기준으로 왕 또는 제후)가 가지는 주권은 개별 국가의 국경선 안에서 절대적이며 국경선 밖에서 평등하다는 '주권 평등의 원칙'을 천명했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는 힘의 논리가 팽배해 수많은 제후와 제후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혹자는 30년 전쟁 이전까지 유럽의 국제체제가 원시적인 것에 가까웠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혼란 속에서도 유럽 전체를 관통하는(어쩌면 하나로 묶는) 키워드가 있었는데 바로
로마(Rome)였다.
로마, 특히 '로마 제국'은 그야말로 대제국이었다.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한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오늘날 튀르키예가 자리한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영국 남부에서부터 사하라 이북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로마가 곧 유럽이었고 유럽이 곧 로마였다. 이 드넓은 영토를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로마 시에 들어앉은 황제가 혼자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행정과 법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로마 제국답게 행정력과 법으로 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로마의 황제는 정복지를 '속주'로 지정하고 각각의 속주에 총독을 파견했다. 총독은 황제의 대리인이으로 속주 안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민법'을 제정했다.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직할지에 거주하는 인민을 '시민', 속주에 거주하는 인민을 '신민'으로 구분하고 시민과 신민 사이의 관계, 나아가 직할지와 속주 사이의 관계를 규율했다. 이 만민법은 오늘날 '국제법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만민법은 국제법이 아니다. 로마 제국의 국내법이다. 요즘으로 치면 만민법은 '민법'과 '지방자치법'을 섞어놓은 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가 하면 속주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 효율적인 통치를 추구했다. 속주에 자치권은 없었으며, 총독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리고 만민법이 시민과 신민 사이의 관계를 규율했다고는 하지만 신민은 속주의 사람이었기에 실제로는 많은 차별을 받았다.
4세기에 이르러 거대했던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고, 유럽의 대부분을 통치하던 서로마 제국은 동서 분할 8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토(古土) 회복'을 외친 동로마 제국이 전성기 시절 로마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한 적도 있었으나 이내 무너졌다. 유럽에서 '로마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하며 부활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아 로마 가톨릭의 보호자가 된 기원후 962년에 수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오토 1세보다 먼저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은 이가 있었는데,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카롤루스 대제)이다. 기원후 800년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았다. 이를 근거로 신성 로마 제국이 기원후 800년에 수립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은 굉장히 독특한 국가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선출/임명직'이었다. 제후들이 게르만족의 지도자, 즉 독일의 국왕을 선출하면 교황이 그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황제가 선출되었다. 부족민들이 한데 모여 지도자를 선출하는 게르만족의 풍습이 영향을 주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황제를 선출하는 제후들의 힘이 강해졌다. 황제를 선출하는 제후들은 '선제후'라고 불렸는데, 선제후를 비롯한 제후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독일의 국왕)와 교황의 신하를 자처하며 사실상 독립국의 군주로 군림했다.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한 '사실상 독립국'들을 '영방(Territorial State)'이라고 일컫는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관계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로마 가톨릭의 보호자이다. 그런데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관을 수여하는 인물이다. 서로 물고 물리는 권력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교황은 끊임 없이 갈등했고, 황제권이 강화되는 시기와 교황권이 강화되는 시기가 빈번하게 교차했다. 영방의 제후들은 황제권이 강할 때에는 황제를, 교황권이 강할 때에는 교황을 지지하며 이익을 챙겼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은 마치 모래성과 같아졌다. '로마'라는 화려한 성을 세우긴 세웠으나, 성을 이루는 모래 알갱이들은 끊임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15세기에 이르러 교황의 권위가 확실히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승리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도 제위보다 독일의 국왕으로 군림하는 데에 더욱 관심을 두고 있던 터라 크게 의미가 없었다. 수많은 제후와 제후국이 나타났다 사라졌으며 로마 가톨릭은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앞에서 언급한 '힘의 논리가 팽배한 중세', '원시적인 국제체제를 향유하던 시대'가 바로 이때이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16세기에 등장한 종교 개혁의 바람은 가뜩이나 실추된 로마 가톨릭에 내려진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이들은 '칼뱅파', '루터파' 등의 이름으로 가톨릭에서 분리되었고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다. 우리가 아는 '개신교'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비롯해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는 주요 영방의 제후들은 보수파로서 로마 가톨릭을 지지했다. 그러나 일부 진보적인 성향의 제후들과 제후들로부터 자치권을 얻어 살아가는 도시(=자유도시)의 시민들은 개신교를 지지했다. (자유도시의 시민들은 로마 가톨릭의 중세적인 교리보다 개신교의 교리가 상업 활동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해 개신교를 지지했다.) 보헤미아 왕국도 개신교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페르디난트 2세가 즉위하며 문제가 생겼다. 페르디난트 2세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것이다.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개신교도들에게 로마 가톨릭을 믿을 것을 강요했고, 충돌이 있었다. 이것이 30년 전쟁(1618~1648)의 발단이었다. 전쟁은 삽시간에 번져 보헤미아 왕국을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과 자유도시들, 에스파냐,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베네치아, 심지어 교황청까지 참전한 국제전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30년 전쟁을 '유럽사 최초의 국제전'으로 보기도 한다.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던 국가들은 1644년부터 종전 협정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 논의는 4년을 끌어 1648년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종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이 바로 베스트팔렌 조약인 것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스위스도 독립한다.
에스파냐의 입장에서 네덜란드를 잃은 것은 매우 타격이 컸다. 네덜란드를 통해 벌어들이는 부가 상당했고, 네덜란드에 해군 기지를 구축해 라이벌인 프랑스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는 종교 개혁이 한창일 때 '반 종교 개혁(Contrarreforma)'를 부르짖었을 정도로 로마 가톨릭의 교세가 대단했다. 연장선상에서 구교파(=로마 가톨릭)를 지원했던 것인데, 이것이 독이 되었다. 에스파냐가 네덜란드를 잃자 반대급부로 프랑스가 급부상했다. 여담으로 네덜란드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을 얻었기에 종교의 자유 등 베스트팔렌 조약의 기본 정신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동성애, 매춘, 대마초, 안락사 등이 모두 합법이다.
2. 개인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를 인정한 선례가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그것인데,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들 중 일부가 개신교를 들여올 수 있었던 이유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로마 가톨릭의 개신교를 상대로 한 박해는 계속되었고, 그 결과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는 승전국과 패전국의 대표들이 모두 모여 종교의 자유를 확실하게 못박았다. 물론 베스트팔렌 체제에서도 개신교에 대한 박해는 숱하게 있었지만,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보수적인 유럽 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도출해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또한 '개인의 종교의 자유'는 '국가의 종교의 자유'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내정불간섭의 원칙'의 토대가 되었다. 국가가 자유롭게 국교를 지정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내정의 자유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3.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는 영방의 제후들은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을 가진다.
앞에서 언급한 주권의 절대성과 주권 평등의 원칙이 이 내용에서 기인한다. 신성 로마 제국에 내리는 사망선고였다.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영방의 제후들 사이의 군신 관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이 모래성이었다면,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은 민들레씨(?)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조항으로 말미암아 영토와 국경의 개념이 등장했고 근대적인 외교 행위가 나타났으며 17~18세기를 휩쓰는 전제군주제의 광풍이 만들어졌다. 주권 평등의 원칙으로 말미암아 세력 균형의 논리 또한 등장했다. 30년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세력의 힘이 너무나도 거대했기에, 개신교도들이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전쟁 이후 유럽의 국가들은 주권 국가 간에 힘의 균형을 이루어 전쟁을 피해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 아이디어는 오늘날 세력 균형의 논리의 핵심 아이디어와 일맥상통한다.
그밖에도 베스트팔렌 조약은 승전국이 일방적으로 패전국에게 요구해 체결되던 강화 조약의 형태가 아닌 외교관들의 토의와 협상을 통해 마련한 협정의 형태에 가깝다는 점과 조약에 명문화한 원칙들을 외면하지 않고 준용해 국제체제로 발전시켰다는 점 등 많은 의의가 있다. 로마의 만민법이 국제법의 원형이라면, 베스트팔렌 조약과 뒤이어 탄생한 베스트팔렌 체제는 '근대 국제법의 원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18세기 이후 유럽 밖으로 확장되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이 강성해지자 유럽의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이 베스트팔렌 체제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미국이 위세를 떨치자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도 베스트팔렌 체제로 들어오게 했다. 20세기에 이르러 베스트팔렌 체제는 제국주의라는 날개를 달고 아시아로 번져나갔는데, 아시아의 국가들은 반강제적으로 베스트팔렌 체제에 들어가야 했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베스트팔렌 체제는 가장 근본적인 국제체제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편적인 국제질서로 자리매김했다. 베스트팔렌 체제가 이야기하는 내정불간섭의 원칙이나 주권 평등의 원칙, 주권의 절대성과 자유, 외교 등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베스트팔렌 체제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보편적인 국제질서라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