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 #7
국가가 외교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하는 정치적인 기술
외교는 전통적으로 위와 같이 정의되어 왔다. 영국의 외교관 해럴드 니콜슨(Harold Nicolson, 1886-1968)은 외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협상에 근거해 국제관계를 경영하는 것
그는 위에서 말하는 '경영'의 주체, 즉 경영인은 대사나 사절과 같은 전문 외교관이라고 주장했다. 위의 두 정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지만 결코 외교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문 외교관뿐 아니라 국가원수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이 외교를 수행한다. 또한 국가 간의 의사소통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도 강조되고 있으며 외교 행위로 분류된다. 외교 현장에서의 의사소통은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 영향을 준다. 오늘날의 외교는 크게 Track 1과 Track 2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정부 간의 의사소통과 교섭을 의미하고 후자는 민간에서의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앞서 전통적인 외교의 정의를 살펴보며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았는가? 전통적인 외교의 정의에 따르면 외교와 외교정책은 다르다. 외교와 외교정책이 다르다니? 많은 이가 외교와 외교정책을 혼동한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외교정책에는 정책을 수립한 국가가 지향하는 대외적인 목표가 뚜렷하게 담겨 있다. 외교는 외교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이자 외교정책에 담겨 있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외교정책에는 외교가 포함된다.
외교는 외교정책이다.
위와 같은 명제는 항상 참이지만
외교정책은 외교이다.
위와 같은 명제가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다.
외교와 외교정책을 혼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교와 외교정책 가운데 먼저랄 것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외교와 외교정책 사이에 명백한 선후관계가 있었다면 두 개념을 구분하기란 한층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개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어, 어떤 것은 외교이고 또 어떤 것은 외교정책이라고 칼로 자르듯 나누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한 국가가 외국의 대외 행위를 인지하고 그 행위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빠르게 계산하여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한다면 그것은 외교정책이고 이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인 국익의 극대화를 위해 사회 구성원이 행동에 나선다면 그것은 외교이다. 그런데 외교정책이 만들어지기 전, 다시 말해 외국의 대외 행위를 인지하고 그 행위를 대상으로 손익을 계산한 것은 외교인가, 외교정책인가? 외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외교정책으로 외교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외교로 외교정책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명백한 선후관계를 밝히기가 어렵다. 때문에 많은 이가 외교와 외교정책을 혼동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외교는 아래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여섯 가지 형태로 구분해볼 수 있다.
공개 여부에 따라: 공개외교와 비밀외교
이해 당사자의 수에 따라: 다자외교와 양자외교
접촉 방식에 따라: 공식외교와 암묵외교
해럴드 니콜슨은 외교에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기능'과 '협상하는 기능'이 있으며 전자의 경우 공개로, 후자의 경우 비공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정치적인 이해 관계가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외교정책도 '정책'이고,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이해 관계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전문 외교관뿐 아니라 외교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부처의 공무원과 정치인, 그리고 일반 시민의 의견까지 폭넓게 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교정책은 숱한 반대에 부딪혀 출발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은 공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협상은 다르다. 협상은 잘 훈련된 전문 외교관이 의제를 공개하지 않고 신속하게 대화에 나설 때 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공개된 자리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협상의 과정과 내용이 알려지는 것은 하나의 목표와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전문 외교관에게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상은 비공개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부분의 외교가 공개로 이루어지는 오늘날 비밀외교가 필요한 이유도 협상 때문이다.
전통적인 외교의 형태는 '양자 간 비밀외교'였다. 그러나 국제기구를 비롯한 다양한 행위자가 등장하고 그 위상이 점차 올라감에 따라, 그리고 지나치게 비밀스러운 외교가 행위자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전쟁의 빌미가 된다는 지적이 늘어남에 따라 외교의 형태는 '다자 간 공개외교'로 변화했다. 다자외교는 모든 이해 당사자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모두 동의하는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해 관계를 조율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모두 동의하는 해결책'을 도출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힌다.
'암묵외교'라는 개념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공식외교는 말 그대로 공식적이고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외교를 의미한다. 정상회담이나 장관회의, 국제기구의 포럼 행사에서 이루어지는 전문가 간의 교류 등이 있다. 앞에서 공식외교와 암묵외교를 구분하는 기준이 '접촉 방식'이라고 이야기했다. 공식외교가 공식적이고 직접적인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외교이니, 암묵외교는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접촉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암묵외교가 반드시 비공식적일 필요는 없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암묵외교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암묵외교는 반드시 간접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암묵외교는 반드시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회의장 밖에서 정부의 관계자가 기자와 인터뷰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정상회담에서 다루어진 의제와 관련한 질문이 나왔을 때, 정부의 관계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것이다. '공감대를 형성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의견을 주고받는 수준이었다'며 논의가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음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러한 인터뷰는 회담에 대한 정부의 만족감이나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어 회담의 상대를 압박한다. 정부의 관계자는 암묵외교를 펼친 것이고, 인터뷰는 암묵외교의 수단이 된 것이다. '공감대를 형성했다', '의견을 주고받는 수준이었다'와 같은 문장들은 대표적인 '외교적 수사'인데 외교적 수사는 암묵외교의 성격을 더욱 강화한다.
지금까지 외교와 외교정책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한 외교의 여섯 가지 형태를 알아보며 '전문 외교관'이라는 단어를 몇 번 언급했다. 전문 외교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 외교관은 당연히 주로 외교 활동을 펼치며 보고(reporting)와 협상(negotiation)을 한다. 보고란 주재국(=외교관이 근무하는 국가)의 사회 전반, 특히 정치와 경제, 군사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한 내용과 발굴한 새로운 정보 등을 본국에 보내는 업무를 말한다. 협상이란 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펼치는 의사소통으로, 보통 본국과 주재국 사이에서 오가는 메세지로부터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국제정치학자 헤들리 불(Hedley Bull, 1932-1985)은 외교관의 역할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했다.
1. 외교관은 실체들(=행위자들) 간의 의사소통을 촉진한다.
2. 외교관은 합의를 위한 협상을 추구한다.
3. 외교관은 외국의 정보를 수집한다.
4 외교관은 국제관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헤들리 불의 견해 역시 보고와 협상이라는 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보고와 협상은 외교관의 주된 업무이자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