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필독서를 덮고 연의 편지를 함께 읽은 한 달

by 사유정원

초등논술학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라포가 형성되는 순간 아이들은 저마다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5학년이었던 한 아이는 유독 책 읽기를 힘들어했다. 자유롭게 두면 한 시간에 채 6장도 넘기지 못할 정도였다. '책 읽는 걸 힘들어하는구나'라고 짐작하고 있던 어느 날, 아이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쌤, 저 국어가 제일 싫어요. 책 읽는 것도 안 좋아해요.


막연한 짐작이 아이의 입을 통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앞으로 어떻게 수업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정해진 커리큘럼과 5학년 시기에 읽어야 할 초등필독서 리스트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곧바로 질문을 바꿨다.


그래? 그럼 무슨 책 읽고 싶어?



나는 아이의 취향을 먼저 살폈다. 하지만 아이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러다 문득 지난 수업 때 아이가 영화로 봤다며 눈을 반짝이며 말했던 '연의 편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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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이는 원래는 만화로 나왔다가 유명해져서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다고, 그래서 친구들이랑 영화관에 가서 봤다고 조잘거리면서 책을 추천해주었다. 내가 직접 사서 읽어본 책은 어른인 내가 봐도 뭉클할 만큼 근사한 작품이었다. 나는 두꺼운 초등필독서를 덮고 강수를 뒀다.





교과 연계와 선행학습이 중요한 논술학원에서 초등필독서를 제쳐두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하지만 두 달 째 같은 책을 붙들고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진도'가 아니라 '성취감'이었다.





아이는 오히려 좋아했다. 책 읽기도, 글쓰기도 싫어하던 아이와 나는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글쓰기는 최소화하고, 소설의 구조에 맞춰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했어?

만약 반 친구가 괴롭힘을 당한다면, 너도 주인공처럼 나설 수 있을 것 같아?




이미 같은 책을 읽은 우리 사이에는 끈끈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이는 더 이상 글쓰기를 '노동'이라 느끼지 않고 자기 생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맞춤법이나 문장 구조를 고쳐주고 싶은 작가로서의 욕심이 울컥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나는 첨삭을 최소한만 하기로 했다. 지금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건 첨삭이 아니라, 내 생각이 존중받는다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변화는 한 달 뒤에 찾아왔다. 억지로 밀어넣을 땐 꿈적도 않던 아이가 스스로 책장에서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끝까지 읽기 시작했다. 물론 고비는 있었다. 때로는 집중력이 흐트러져 멍하니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다. 나는 다그치는 대신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었다. 방임이 아닌 존중을 바탕으로 한 약속이었다.




오늘 우리가 약속한 목표만 다 채우면, 남은 시간은 쉬어도 좋아!



그렇게 아이는 조금씩 자기만의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아이를 가르치면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좋은 문장은 억지로 쥐어짜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차오를 때 비로소 터져 나온다는 것. 마음이 먼저 열려야 문장이 읽히고 글이 써진다.



이제 그 아이는 더 이상 국어가 싫다고 말하지 않는다. 논술학원에서 자신이 읽을 다음 '편지'를 고르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나는 느리지만 단단한 성장의 문장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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