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박경리의 토지를 보고 있다. 책이 집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쳐다 보지도 않다가 유난스럽게 도서관까지 쫒아가 빌려 보느라 수선을 피우고 있다. 사람이 변덕 스러운 것은 종의 특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감칠맛 나는 사투리가 섞인 문장과 마치 영화를 보는듯한 탁월한 장면 묘사 그리고 가끔은 화들짝 놀라게 하는 잊어버렸던 과거를 소환하는 표현이 압권이다.
하지만 몇 권을 읽다 잠시 읽기를 멈추는게 좋다는 생각을 했다. 나 만의 문제일지는 모르지만 지나치게 자꾸 과거로만 몰아 간다는 느낌이 점점 짙어졌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미래를 마주하고 있을 때 가치 있는 것인데 그저 아스라한 지난날에 푹 잠겨가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나른 하기는 하지만 두근 거리지는않았다.
그러던 중 전등을 교체하다가 읽고 지났쳤지만 께끔사게 걸려있던 구절이 갑자기 떠 올랐다.
“귤 빛”이 그 것이었다.
난 지나치게 밝고 하얀 빛을 좋아 하지 않는다. 햇볓은 차라리 색깔이 없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하얗고 밝은 빛은 마치 수술실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어 가급적 집에는 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주광색’, 또는 ‘형광색’의 전등은 쓰지 않고 항상 ‘전구색’을 쓴다. 그런데 같은 전구색도 전등 갓에 따라 나에게 도달하는 빛의 색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갓에 따른 전등 색을 비교해 보고 내가 제일 좋아 하는 전등색을 정했는데 그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난 ‘귤 색’ 전등을 좋아 하는 사람이다.
향(香)도 다르지 않다. 앨러지 비염이 있는 나는 석유향이 깔린 냄새 사나운 방향제는 딱 질색이다. 그런데 큰 항아리를 쓰기 위해 묵은 매실청을 덜어내 작은 항아리로 옮기는 동안 맡았던 매실향은 공손했다.
‘귤 색’ 전등을 켠 작은 방에 그 매실향이 은은히 배어 있으면 하는 소망을 해봤다.
청매실 향은 젊어 산뜻할 터이고 황매실향은 잘익어 넉넉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꽃게는 아카시아 꽃이 필 때 많이 잡히니 꽃게 요리집은 아카시아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으면 짝이 맞겠고, 냉면은 메밀이 들어가야 맛이니 냉면집은 메밀향이 배어 있으면 좋겠다. 그럼 삼겹살 집에는 마늘향이 배어 있어야 하나?
패션 업계 지인중에 남충이(가명)이라는 분이 있는데 머리숱은 많지 않은데 다른 털은 많은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한 여름에도 언더 셔츠를 받쳐 입고 반팔셔츠는 가급적 삼가는 등 다소 보수적인 패션 코드를 고수하고 있다. 특히 천연소재를 좋아해 여름에는 주로 마(麻, 린넨)로 된 제품을 즐겨 입는다. 올이 굵은 마로 성기게 만든 옷은 시원해 보이기도 하지만 구김도 적잖이 가고 잘못보면 상복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그걸 표현을 잘못해 “수의(壽衣)를 입고 나오셨네요!” 하는 실수를 한적이 있다. 수의는 살아 있는 사람은 좀처럼 입지 않는 옷이다.
그런데 어느 결에 내가 한 번 입어보니 천연소재 옷감이 주는 느낌이 무척 편했다.
젊음은 무엇일까?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반짝이는 호기심과 변화에 능동적인 것이 젊지 않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맹목적으로 옛날로 돌아가고 옛날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데 반대한다.
또한 유니폼이 주는 권위에 의지해 권력을 담보하는 것도 유치해 보인다. 경찰관, 소방관, 의사 선생님과 같이 사회적 임무를 표시하고 맡은바 소임을 하는데 편한 유니폼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복식을 치렁치렁하게입는 승복이라던지, 그 출처를 잘 알 수 없는 목사님들의 가운은 영 마뜩치 않다. 청바지를 입고 목탁을 쳐도 진리의 음성은 삼계에 충만하고 반 바지를 입고 성령의 말씀을 전해도 그 은혜의 충만함은 덜어지지 않을텐데.......
그게 정말 진리이고 성령의 말씀이라면 말이다.
쓸데없이 더 이상 구업(口業 - 입(말로)으로 짓는 죄업)을 지을일이 아니고 날이 어둡길 기다려 ‘귤 빛’의 부드러운 전등아래 매실향이 은은히 밴 방에 품이 넉넉하고 편안한 머슴 바지를 입고 들어 앉아 토지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