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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의 향진기업

(1) 天時 담에 지리 인화를 더 쓰고 책 엮기

by 누두교주

우리는 오늘날 중국이 G2로 성장하도록 한 개혁, 개방 정책이 원대한 목표와 심모원려의 세밀한 계획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 개방은 구체적 계획이나 청사진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은 단지 문제에 대한 인식(경제발전의 필요성)을 공유한 상태에서 다양한 대증적(對症的) 실험을 통해 긍정적인 결론에 대해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것인 '돌을 더듬으며 강을 건너다(摸着石头过河)’'이다.

1997년 완리(万里)(1)가 안후이성 당서기로 부임해 안후이성의 상황을 살펴본 그는 아래와 같이 탄식했다.

"농민들 집은 벽밖에 없고(家徒四壁),

마치 씻은 듯이 가난하며 (一贫如洗),

옷은 몸도 가리지 못하고 (衣不迟体),

먹어도 허기를 채우지 못하니 (食不果腹),

(스스로의) 마음에 물어 부끄럽기 그지없다(问心有愧)“.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의 농촌개혁을 추동하게 된다.

그의 개혁 정책은 '초과 생산분에 대한 보너스 지급(超产奖励)을 시작으로 '조별 도급 생산 책임제(包产到组责任制)'로 진화하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산 농가를 기준으로 하는 '호별 도급 생산제(包产到戶)'를 거쳐 '전면 청부제( 大包干)'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사회주의 정책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사회주의 세력으로 부터 강력한 저항이 발생했다. 여기에 면죄부를 부여한 것이 등소평이었다.


등소평은 1980년 5월 31일 안휘성 펑양현(凤阳县)의 '전면 청부제( 大包干)'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언급을 함으로써 농촌개혁의 방향으로 확정 짓게 되었다. 계획에 따라 실행한 것이 아니고 단계별로 실시하며 좋은 결과가 나오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하다 보니 사회주의를 떡 사 먹게 된 경우이다.

이러한 농촌 개혁을 통해 농민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영위할 기반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농촌의 잉여인력에 대한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즉 농업에 대해 인센티브가 제고되고 수탈이 중지돼 농업소득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나 경작 면적은 늘지 않았으므로 농촌의 잉여 인력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안이 된 것이 이른바 '향진기업(乡镇企业)'이다.




농촌에 설립된 향진기업은 ‘농업의 소득 증대에 따른 잉여 자본과, 농촌의 잉여 인력, 그리고 개혁, 개방으로 인해 생겨난 시장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난 농업에 뿌리를 두고 농민이 주체가 되어 만든 기업(2)"으로 정의된다. 중국 학자는 향진기업의 발전과 개혁이 "시장 경제체제를 실현해 나가는 한 장의 웅대한 청사진(3)"으로 정의했다.


우리와 서해 바다를 건너 마주하고 있는 중국 산동성 청도시의 경우 1984년 등소평의 선전 시찰 이후 개방된 14개 동부 연해 도시 중의 하나였으나 화교자본 접근이 용이하지 못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남부 연해지방(광동(广东), 복건(福建), 절강(浙江), 강소(江苏) 성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낙후돼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989년 위정성(俞正声)(4)이 산동성 청도시 부시장으로 부임하며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그는 1994년 서울 -청도 간 직항 편을 개설하는 등 한국 기업유치에 공을 들였으며, 이에 따라 청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1989년 세 개에 불과했으나 1996년엔 920개로 폭발적으로 증가해 그에게 있어서 천군만마와 같은 도움이 되었다(5). 그러나 향진기업의 저 품질, 저가 상품 위주의 경공업 산업은 소재, 기술, 디자인 등 자체 경쟁력을 가진 부분이 전무한 상태였다.




청도 지역의 향진 기업 중에 1986년 설립된 '칭다오베뢰복장 유한공사(青岛蓓蕾服装有限公司)'란 회사가 있었다. '심성(心声)‘이란 브랜드로 저가의 아동복을 생산해 파는 향진 기업이었다.


그러나 농업경제 위주인 산동성은 시장이 매우 협소해 인근의 하북성, 하남성, 강소성 북부 및 내몽고 등지에 판매처를 확보하려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못했다. 강소, 절강, 복건, 광동 등 앞서 개방돼 소재, 기술, 디자인에 앞선 남방 연해 지방의 향진기업들과 경쟁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더가 불안정했고, 채산성도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에게 있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은 선진 기술과 생산 노하우를 습득하며, 오더를 수주할 걱정과 대금 회수의 부담 없이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는 귀인(贵人)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안에 그런 귀인은 없었다.


당시 서해 바다 건너 한국의 패션 기업의 상황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인건비와 생산 부대 비용이 급격히 상승했으며 이에 따라 노동 집약적 생산 체제가 와해돼 대규모 오더의 수행 능력이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대규모 생산 공장과 숙련된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 내에는 그런 공장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 완리(万里_), 1916년 12월 - 2015년 7월 15일, 한족, 산동성 동평현 출생. 1936년 5월 중국 공산당 입당. 중국 공산당 제11차, 12차 중앙서기처 서기, 제12, 13차 중앙 정치국 부 총리, 제7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등 역임.


(2) 조영남, 2016, p.163.


(3) 린이푸(林毅夫 ) 등, 2001, pp. 217 - 221.


(4) 위정성. 1945년 절강성 소흥(绍兴) 출신. 하얼빈 군사 공정 학원 유도탄 공학부 자동제어 학과 졸업.


(5) 그 덕에 힘입어 그는 습근평이 총서기에 오른 후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의 한 명으로 중국 권력 서열 4 위의 전국 정협 주석까지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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