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에는 오른손에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일반적인 정의의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어 저울을 볼 수 없는 것에 비해 특이하게 눈가리개를 하고 있지 않다.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또 칼 대신 전화번호부 크기의 책을 들고 있어 정의의 여신상의 기원이 된 고대 그리스의 디케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런데 동양에는 법과 관련된 상징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그것도 법(法)이라는 글자 안에 도사리고 있다. 원래 法이라는 글자의 옛날 글자는 아래처럼 생겼다. 오늘 쪽에 보면 뿔 달린 괴물 같은 보인다. 이 괴물 이름은 해치(獬廌 또는 獬豸)라고 하는데 시비와 선악을 판단해 나쁜 사람은 뿔로 받아 버린다고 하는 동물이다.
위 금문의 서체를 오늘날의 해서체로 쓰면 이와 같이 된다. 삼수변과 갈 거(去)자외에 치(廌) 자가 보인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법을 모르고 평생을 사는 것도 큰 행복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내가 금주를 결심한다고 그것이 가능한가? 꼭 전화하는 친구가 있는데! 오죽하면 공자님도 “나무는 고요히 있고 싶으나 바람이 그치질 않는다”라고 했을까? 본의 아니게 법원 출입을 하게 된 것의 변명이다.
머리와 성정이 좋지 않은 상태 불량한 녀석이 애먼 사람에게 소송을 걸어와 몇 년을 고생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바와 같이 완벽히 승소했다. 따라서 그동안 내가 쓴 소송비용을 나에게 재판을 청구한 녀석이 물어내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물어내라고 하니 갑자기 주소를 강원도로 옮겨 놓고 회사도 차명으로 바꾸고 갖은 재주를 다 부렸다. 본래 정의라는 개념은 DNA에서 제거하고 출생한 생물체인지라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요 녀석은 내 소싯적 별명이 ‘대연각’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과거 대연각이라는 건물에 큰 불이 났었는데 누군가가 물수건을 물고 여러 시간을 줄기차게 버텨 결국 살아났단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은 것이 아니라는 말처럼 나도 참고 기다리는 데는 자신 있는 사람이고 한번 결심한 걸 중도에 포기해 본적이 몇 번 없는 사람인데 그런 잔재주를 피우다니 될 말인가? 결국 꼬리를 잡았다.
따라서 그동안 준비한 여러 가지 항목의 강제집행을 동시 다발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강제 집행 즉 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빼앗아 오려면 반드시 판결문, 집행문, 송달 문이 세트로 있어야 하며(이하 판결문 세트) 복사 본은 인정되지 않고 꼭 법원에서 발행한 원본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승소하면서 받은 판결문 세트를 압류 추심하는 데 사용하고 나니 다른 강제 집행을 하려면 재발급을 신청해서 다시 발급받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동시 다발적 강제 집행을 하기 위해서 원본을 여러 통 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판결문 세트를 재발급받기 위해 필요한 것부터 검색해 가며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판결문 재발급이라는 용어가 없다. 판결문 세트는 재발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재도부여’를 한단다. 재도부여가 무슨 뜻일까? 한글 전용이라 한자가 없으니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다. 재도부여(再度附與), 재도는 재차라는 뜻이니 두 번째라는 의미이고 부여는 지니거나 갖도록 해준다는 뜻이니 결국 재발급이다. 그런데 왜 꼭 재도부여라고 할까? 다른 데서 이 말을 쓰는 곳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면 세 번째 발급할 때는 삼도부여(三度附與)라고 하나? 그것도 재도부여라고 한다. 당연히 사전에는 없다.
그러면 여러 장 발급받는 것은 무엇이라고 할까? 일단 한번 잘난 척했으니 ‘부여’라는 단어는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여러 장이니 많을 다(多)를 써서 다수 부여 또는 다장부여라고 할까? 아니면 2장 부여, 3장 부여하는 식으로 숫자를 표시해 줄까? 답은 놀랍게도 ‘수통부여’였다. 물통을 준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할 때의 ‘수’와 서류 한통 두통 할 때의 ‘통’을 붙여서 수통부여라고 하는 것 같다. 원래 우리말이나 한문의 수통(垂統의) 의미는 좋은 전통을 자손에 남긴다는 의미인데 이런 건 법원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다른 나라 이야기이다.
사실은 처음 소장을 받았을 때 법률의 문외한이긴 하지만 내가 직접 소송을 진행하려고 했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 매우 분명한 사실이고 한국어로 소통하는데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 변호사가 보낸 준비서면을 받아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법률용어를 나열했을 뿐만 아니라 문장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따로 노는 것은 물론 맞춤법이나 문장 부호도 눈에 거슬렸다. 특히 자신의 논리는 없고 내가 전개한 논리를 단장취의해서 ‘원고의 이익으로 삼겠다’는 표현은 아주 날로 먹겠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보였고 변호사도 날로 된 것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게 했었다.
이런 변호사들에게 있어서는 재도부여나 수통부여처럼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많으면 많을수록 밥 벌어먹고 살기 좋은 환경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나라 법조계에 이런 구식 초성은 절대 없어지거나 개선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전망을 하는 부류이다.
법률 관련 판결문이나 준비서면도 단정하면서도 단호하고 정갈하면서도 그 논리구성이 치밀한 문체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문적인 법률용어도 앞, 뒤 문맥을 이어 보면 쉽게 이해가 될뿐더러 한글로만 문장을 구성했어도 우리말 화된 한자어의 사용으로 인해 가독성에 전혀 문제가 없는 문장을 여럿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은 대부분 판결문 이거나 사법고시를 거친 변호사의 준비서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른바 로스쿨 출신의 경우는 문장의 수준이 많이 다른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법률 관련 용어나 문장이 어려울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백성에 봉사하기 위해 더욱 백성들의 말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또한 고도의 법률적 지식을 갈무리한 상태에서 나오는 쉬운 글은 노포의 냉면 맛처럼 담백하지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이익을 좇기 위해 자신의 못남을 감추며 만든 글은 중국산 김치처럼 뭘 잔뜩 넣고 버무리긴 했는데 맛도 없고 보기도 좋지 않고 건강에도 해롭다. 재도부여와 수통부여와 같은 용어는 이러한 중국산 김치 같은 변호사들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
과거의 해치는 악행을 범한 사람을 뿔로 들어 받아 응징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오늘날 수준도 안 되면서 법을 응용해 이익을 탐하는 자격 미달의 변호사들은 언젠가 줄 서서 단체로 해치에게 들여 받힐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법원에는 정의의 여신도 좋지만 해치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재도부여는 재발급이라고 하면 되고 수통부여는 복수 발급이라고 하면 되지 않는가? 국민에 복무하지 않고 국민을 위하지 않는 조직의 존재는 어떤 방식이던 오래갈 수 없고 오래가서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