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나라 사람 두 명이상 모이면 쭈그리고 앉아 김연경의 폼으로 군용 모포 위에 스윙을 해대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에서 전래된 하나후다(花札)가 우리나라에 화투로 재탄생되어 미국의 영향을 받아 〈Go Stop〉이라는 국민게임이 자연 발생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게임은 매우 역동적이며 가변적인 특성을 가지는데 그 이면에는 게임의 규칙이 지역별, 연령별, 시기별도 다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서 게임 시작 전에 1점에 얼마인지, 광 값은 얼마인지 피박, 광박은 있는지, 멍박은 허용되는지 등 세세한 규칙을 서로 점검하는 Rull meeting은 필수이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분쟁이 발생해 수시로 격렬한 장외 설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모두를 포괄하는 고스톱 게임의 헌법적인 규칙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게임의 이름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매우 과감하고 신속한 판단을 요구한다. 다소라도 시간을 끌면 “경로당 화투 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두 번째로는 냉혹한 자본주의의 사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완가리 완뻰치’로 표현되는 외상 없는 게임의 원칙이다.
세 번째는 ‘낙장불입(落張不入)다. 게임의 유래를 반영하듯 대부분의 룰이 일본어, 영어 또는 그것에서 파생된 피진(pidgin)과 같은 혼성어 인데 이 것만 유독 한자성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의미는 ‘한번 내려친 패는 물리려고 다시 들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한 물간 줄 알았던 고스톱의 룰이 대한민국 경찰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경찰서를 간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은 형사 사건에 있어 당사자 간 해결을 금지하고 있으며 국가 공권력이 이를 대신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러한 합법적 폭력은 우리가 내는 세금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내가 형사상 피해를 입은 경우 경찰서에 신고를 해서 경찰의 수사를 통해 법이 정한 벌을 주는 절차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해줄 수 있는 잘못의 범위를 넘어서 바름(正)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경우 반드시 경찰서에 신고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
나에게 잘못한 녀석은 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도록 주소를 강원도에 정해 놓았다. 그래야 찾아오는 사람은 물론 강제 집행도 피할 수 있는 잇 점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녀석이 주소지를 둔 강원도 00시 경찰서에 전화를 해 주소와 받는 부서 이름을 문의하였다. 고소장을 등기우편으로 접수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IT강국인 우리나라는 나쁜 놈 주소지 경찰서까지 서류를 보내는 번거로움을 제거했다. 그냥 내가 가기 편리한 경찰서에 접수하면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8월 5일은 휴가 출발하는 날이다. 오전에 출근해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오후에 집 근처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하고 출발할 계획을 세웠다. 며칠을 고민해 정성 들여 작성한 고소장과 관련 증거를 잘 갈무리해 강남 경찰서를 찾아갔다. 새로 지은 건물이 웅장했다.
1층 민원실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가 접수를 하니 뭔가 도장을 찍더니 경제 00팀으로 가라고 했다. 안내 데스크에서는 2층이라고 안내를 해주고 출입증 없어도 되니 바로 가라고 했다.
2층에 올라가니 문이 잠겨 있었고 주변을 살펴보니 인터폰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가야 하는 경제 00팀의 인터폰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지금 바빠서 못 나가니 기다려라. 아니면 다른 사람 들어오는 길에 묻어 들어와라”라는 안내를 받았다. 순간 ‘내가 뭐 잘못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유쾌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잠시 기다리니 누군가가 출입증을 스캔하고 들어가 길래 ‘묻어서’ 들어가 경제 00팀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순간 나는 아! 잡상인이 낯선 장소에 들어갈 때 느끼는 느낌이 이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부터 혹시 잡상인을 만나게 되면 반갑게 인사하고 잘해줘야겠다 라는 결심을 했다.
비척비척 들어가 앞자리가 빈 직원(경찰관)에게 엉거주춤 고소하러 왔다고 하니 턱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나에게 불만 있는 태도였다. 고소장을 내밀었더니 대충 넘겨보더니 “강원도 사건이네. 이거 여기서 조사하면 어차피 보완하라고 할 텐데. 저기 관할이라고 아세요?”
어라! 왜 강원도 00시 경찰서와 서울 강남 경찰서가 다른 이야기를 하지? 내가 대한민국이 아니고 중화인민 공화국에 있는 건가? “강원도 00 경찰서에 전화해 문의하니 고소장은 가까운 경찰서 아무 곳이나 접수할 수 있다고 안내받았다”라고 하니 한숨을 푹 쉬더니 아까 본 페이지들을 다시 오가며 컴퓨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최대한 정중하게 질문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가도 되나요?” 휴가를 함께 갈 일행이 경찰서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사람이 앞에 앉아 있는데 쓰다 달다 말없이 딴짓하는 태도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조사 받으셔야죠! 한 시간 넘게 걸릴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휴대폰 카메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잡상인처럼 보이나? “좋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일행에게 카톡을 보내 두 시간 기다려야 하니 알아서 놀고있으라고 했다.
뻘춤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제 가담당인데요 잠깐만기다리세요” 하고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고 저 친구가 담당이라면 내 앞에 앉아 컴퓨터를 조작하는 친구는 누구이며 뭘 하는 것인가? 내가 경찰서에 고소인으로 온 것이 아니고 간첩 혐의를 받고 국가 정보원에 연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잠시 후 담당이라는 친구가 자기 자리로 오라고 해서 갔다.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하고 물었다. 물론 경찰이 물어보는 말이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경찰서에 들어온지 이미 40분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고소장을 대충 훑어보더니 이 첫마디가 “이거 강원도 가시면 깔끔하게 처리되는 데요”였다.
아! 내가 잘못 왔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도 관할이란 무었인가? 하지만 여기서 조사해 달라면 해줄 수는 있다!는 내용으로 결국은 강원도에 가야 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았다. 상대는 지능적으로 변호사와 결탁해 갖은 재주를 다 부리는데 수사 의지도 없는 친구들이 어떻게 범죄 입증을 할까? 대한민국 경찰은 정말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가? 혹시 나는 대한민국 국민 아닌가?
나는 강남경찰서에서 조사받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열심히 수사를 해도 ‘법꾸라지’를 잡을까 말까 한데 돌아가면서 관할 타령이나 하고 있고 민원인의 입장에서 사고하지 못하는 수사관에게 조사를 받아봐야 시간 낭비라는 합리적인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관할 경찰서로 가겠으니 고소장을 돌려 달라고 했다. 그런데 담당 경찰 왈 “한번 낸 고소장은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낙장불입 아닌가? 나는 고소를 포기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물론 기분 참 잣(소나무과 식물의 식용 가능한 종자) 같았다.
담당 경찰이라는 친구는 8월 6일 오전에 전화해 30분 넘게 장황하게 떠들었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나(경찰)는 잘못한 것이 없다”이고 둘째는 강남경찰서에 와서 조사받으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잘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소를 진행하기 위한 정보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은 없었다.
8월 9일 다시 전화해서는 ‘각하’ 처분을 하겠다고 했다.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한 번도 민원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한 것은 없었다. 경찰 업무의 특성과 절차에 관해 설명하려고 했다. 왜 경찰이 민원인을 상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경찰들끼리 고소하고 조사하면 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8월 19일 우편으로 수사결과 통지서라는 것을 받았다. 내용은 고소인 조사를 할 수 없어 사건을 각하한다는 것이었다. 왜 고소인이 조사를 받지 못하는지(않는지)는 한 글자도 표시되지 않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고소인은 나와 주식회자 00 둘이며 각각 입은 피해를 고소장에 명기하였으나 수사 결과 통지서에는 한 사람의 고소인과 피해액만 적시되어 있었다. 고소장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읽고도 이해를 못했거나 아니면 법이 그런 것인가 보다 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2021년 9월 4일 날씨는 기막히게 좋았다. 나는 강원도 춘천시에서 고소인 조사를 받기 위해 상봉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처음 강남경찰서에 간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범인들이 증거를 잘 보존하고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