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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공무원 선서

개 풀 뜯어먹는 소리(狗食草聲)

by 누두교주

며칠 전, 구매한 중고 자동차의 명의 이전을 위해 광진 구청을 방문했다. 우선 주차가 무척 어려웠다. 나야 어쩌다 오는 민원인이지만 매일 출, 퇴근하는 공무원들은 차대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렵게 주차를 하고 교통민원실을 찾아 2층에 올라갔다. 설마 지들만 정한 자리에 편히 주차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관청 출입을 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뺑뺑이” 도는 것이다. 나름대로 아무리 열심히 꼼꼼히 준비해 가도 꼭 트집을 잡히고 다시 뭔가를 준비하기 위해 헤매야 하는 낭패를 경험한다.


내가 볼 때는, 민원인을 뺑뺑이 돌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집단 문화가 존재하던지, 아니면 공무원 인력이 매우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민원인의 입장에서 선제적으로 안내하고 지원하는 인원 배치를 그다지도 징그럽게 거부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①


오늘은 뺑뺑이 당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우선 준비해야 하는 서류, 기입할 내용, 첨부 서류를 민원인이 없는 빈 창구 공무원을 찾아 질문했다. 당연히 달리 안내하는 직원도 없고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으니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심정으로” 내가 미리 챙긴 것이다.


작성해야 하는 서류는 2가지인데 첫째는 [자동차 양도증명서(양도인·양수인 직접 거래용]였다. 갑. 양도인, 을. 양수인과 거래내용을 기록하고 각기 서명하면 되는 서류로 별도 첨부 서류는 없었다. 문서 표현이 일본식인 것을 제외하면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②


두 번째 서류는 [이전등록 신청서]였다. 이 서류에도 구 소유자(양도인), 신 소유자(양수인)를 쓰고 거래내용을 다시 한번 쓰는 것과 동시에 등록 원인에 표시하는 내용이다. 왜 같은 내용을 두 번씩 써야 되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참고 썼다.


이 서류 뒷면에는 제출해야 할 서류가 작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여러 번 꼼꼼히 읽어 보았다. 비사업용 자동차를 등록하는 법인 등의 경우인 내가 준비해야 할 서류는 딱 두 가지였다.

1. 자동차 양도증명서.

2. 사업자등록증 또는 법인 등기사항 증명서.


모든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고 정확히 기재하고 첨부 서류의 순서까지 맞춘 후 자신 있게 접수했다. 하지만 공무원은 [이전서류]라는 제목이 인쇄된 종이 위에 익숙한 솜씨로 색연필 동그라미를 그려 줬다. 서류가 부족하니 더 가져오라는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뺑뺑이 명령서를 받은 것이다.



[이전서류]에 따르면 나는 법인인감증명서, 사업자등록증 사본, 자동차등록증을 가지러 또 어딘가를 헤매러 가야 한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1. 왜 이 중요한 [이전서류] 감추어 두고 있었을까? 처음에 신청서류를 안내할 때 [이전서류] 문건을 함께 안내해주지 않은 이유는 뺑뺑이 돌리기 위한 작전일까? 아니면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2. 어떻게 정체불명의 [이전서류]가 정부에서 폼 나게 만든 [자동차 등록규칙 {별지 제14호 서식 <개정 2018. 12.19>]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무시하고 또 다른 서류를 요구하며 민원인을 뺑뺑이 돌릴 수 있을까? 어떤 헌법이나 법령의 관련 규정에 근거한 행정인가?


3. 자동차를 사서 이전등록을 신청하는 사람은 [자동차 등록증]이 없는데 무슨 수로 자동차 등록증을 가져오라는 이야기인가?


위와 같은 소박한 의문에 대해 공무원에게 질문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뺑뺑이를 지시한 공무원외에 여러 공무원과 대화할 수 있었다. 옆자리, 뒷자리, 옆 부서, 그리고 좀 높아 보이는 사람 등등...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분위기의 토론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별지 제14호 서식 <개정 2018. 12.19>]의 서류만 첨부하면 되며 [이전서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뺑뺑이 돌러 가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나만 뺑뺑이에서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이전서류]의 요구에 따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뺑뺑이를 돈 동료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좀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진구청의 자동차 민원실은 무척 넓었다. 자동차 등록 관련 창구 7개 외에도 세무, 주차단속, 그리고 카드 불가 현금 전용의 kb국민은행 창구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수십 명의 공무원과 그보다 많은 수의 책상이 있었다.


많은 공무원들은 개인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공무’에 열중하고 있었고 높은 사람들은 멀리 뒤에 앉아 뭔가 중요한 비밀 공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길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많은 부서에 민원을 요청한 국민은 단지 4명만 앉을 수 있는 공간➂이 있을 뿐이며 서 있을 자리도 상대적으로 매우 좁아 보였다.


구청은 구청 공무원의 직장이며 일터이지 민원인은 어쩌다 잠깐 와서 필요한 업무를 처리하면 다시 올 일이 없는 존재일 경우 이런 공간배치는 매우 탁월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동차 민원실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처음 시선이 가는 지점에는 커다란 액정 tv가 걸려있고 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돼 방영되고 있었다. 구청장이 금년에 구민의 삶이 무척 좋아질 것이라고 폼 나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그 목표 중의 하나가 “코로나 OUT"인데 그는 이미 마스크를 벗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장면에서는 방역을 빈틈없이 점검하겠다고 노란 잠바 입고 마스크 쓰고 있는 모습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참 쇼(SHOW) 잘한다! 하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관문인 [서울특별시 도시철도 공채 매입 신청서]를 작성하고 1층에 가서 수납하고 다시 2층으로 돌아와 민원의 마무리를 기다리며 공무원 선서를 검색해 보면서 일부 수정/보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헌법과 법령을 준수(할 수 있을 때)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척도)하며 (가끔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임무를 (내 이익의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하라고 해서 일단)합니다.




일을 다 마치고 어렵게 주차한 차를 빼서 주차장을 벗어나려 하니 차단기가 꿈쩍을 하지 않고 주차요금 2,000원을 내라는 표시가 들어왔다.


내가 내 나라 관청에 일 보러 와서 왜 주차요금을 내지?


라는 소박한 질문이 떠올랐지만 다른 약속이 생각나 한숨 한번 푹 쉬고 신용카드를 꺼내 돈을 내고 말았다.


환영받지 못하는 이곳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


① 서울 중앙 지방법원의 경우는 민원서식이 비치된 곳에 민원인 안내만을 전담으로 하는 직원이 배치되어 있다. 그걸 보면 구청 직원은 지금까지 아무도 법원에 다녀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② 친일 청산의 첫발을 이런 데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 당장 일상의 친일은 놔두고 돈과 시간과 국력을 기울여 과거의 친일을 오늘의 잣대로 어째 보려는 의도는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➂ 사진에 보면 의자는 8개다. 하지만 거리두기를 위해 하나씩 비우면 4개가 남는다. 그러나 광진 구청 교통민원실 의자에는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위 노란 잠바 입고 마스크 쓴 사진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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