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저녁 메뉴, 그래도 평화
카톡,
"오늘 저녁 뭐 먹을까?"
퇴근 전, 신랑에게 메시지가 왔다.
"뭐, 당기는 거 있어?"
"짬뽕? 아니다 순대볶음?"
"아, 오늘 집 앞에 순대차 오는 날이다. 그럼 순대볶음으로 먹자."
"빨간걸로? 하얀걸로?"
"소스 빨간거 만들어 찍어먹고, 백순대로!"
이건 사실 8세, 10세의 입맛에 맞는 메뉴는 아니다. 철저하게도 마흔을 앞둔 어른들을 위한 메뉴이다. 아이들은 그럼 무얼 먹냐고? 음... 냉장고를 뒤져보면 아이들을 위한 메뉴는 어떻게든 만들어진다. 적당히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것으로 가능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리고 매일 이런식으로 저녁식탁의 메뉴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늘 먼저 물어봤다. "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그래서 매번 비슷한 메뉴를 메인으로 한 저녁식탁이 완성되곤 했다. 마흔을 앞둔 어른들의 입맛은 크게 고려되지 않은. 그런데 그런 저녁식탁이라면 누군가 한 명 쯤은 만족을 해야 하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면 행복한 식사를 마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우리 집 아이들은 음식에 크게 감흥이 없다.(엄마아빠의 유전자가 있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 그 유전자가 빛을 발하려나, 아직은 아니다.) "안 먹어.", "이거 싫은데.", "계란 후라이 없어?", "이거 꼭 다 먹어야 해?". 밥 한 숟갈 뜨기도 전에 기분이 상한다. 엄마 아빠의 취향을 고려치 않고, 또 아이들이 먹지 않는 것들을 다 제외하고 평소에 잘 먹던 것만을 차린 식탁이다. 그렇지만 시작은 대부분 이렇다. 이러면 김이 팍 샌다. 심지어 우리는 그런 메뉴일지언정 아주 신나게 먹고 배가 너무 부른데, 아이들은 아직 반 그릇도 채 먹지 않았다. 사정사정 애걸복걸 해 가며 비위를 맞춰가며 숟갈 숟갈 억지로 떠먹인다. 지친다.
어느 순간, 생각을 바꿨다. 이럴 거면 나 먹고 싶은거 차려 먹자. 생각을 생각을 아주 맞춰서 메뉴를 정해주어도 결국은 애걸복걸 떠먹이는 거라면, 그냥 적당히 주고 알아서 먹으면 배신감은 덜 하겠지. 그 수고를 우리를 위해 하자.
퇴근 길에 나는 슈퍼에 들러 쫄면사리와 들깨가루를 샀다. 집에 와서 쫄면사리를 물에 불려두고, 냉장고 야채칸에서 양배추와 당근을 꺼내 석둑석둑 잘라 손질해두었다. 깻잎도 씻어 절반은 손질하고 절반은 쌈용으로 두었다. 아, 양념장. 초고추장 베이스의 백순대 양념장은 숙성이 필요하다며 신랑이 신신당부했다. 미리 만들어두라고. 집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양념장 만들기구나. 하하하. 신랑은 퇴근하면서 집앞 순대차에서 찰순대를 한 접시 포장해왔다. 준비는 끝났다. 신랑은 얼른 부엌으로 들어와 웍을 꺼내 손질해 둔 재료와 순대를 넣고 요리를 완성한다.
아이들 저녁? 일단 밥과 김과 김치는 있다. 그래도 이걸로 끝내면 조금 양심이 없긴 하지. 그정도로 파렴치한 엄마아빠는 아니다. 우리집 아이들은 두부를 좋아한다.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에 양념이 고루 배인 푹 익은 두부는 그래도 거절않고 먹는다. 백순대를 볶을 웍 옆에 작은 뚝배기 하나를 올려두고, 코인육수와 된장 한 술을 풀어두고 팔팔 끓인다. 그리고 야채 몇 가지를 넣고, 두부를 듬뿍 넣는다. 그렇게 두부에 된장찌개 양념이 고루 배일 때까지 그냥 진하게 졸이듯 끓인다. 오늘의 저녁 반찬 끝. 정말 백순대볶음에 비하면 에너지 소모가 거의 없는 간단 뚝딱 된장찌개다. 백순대볶음 메뉴에 들인 정성에 비하면 영점에 가깝다.
"저녁 먹자."
"오늘 저녁 뭔데요?"
"된장찌개에 두부, 김도 있어."
"이건?"
"어, 순대야채볶음인데, 먹어볼래? 맛있어."
"아니."
"그래, 먹고 싶으면 먹어보고, 싫음 먹지마."
"순대 싫으면 야채만 먹어보던가."
"아니에요."
"그래."
엄마와 아빠는 깻잎에 쫄면사리와 야채, 양념장을 푸욱 찍은 순대를 올려 야무지게 쌈을 싸 먹는다. 아이들은 김 한장에 흰 쌀밥을 얹어 와앙- 물어 먹는다. 뜨끈한 된장찌개의 두부도 쏘옥, 오물오물 입 안에서 으깨 먹는다. 한 식탁 다른 메뉴이지만 이 정도면 모두가 만족스럽다. 어짜피 안 먹을 걸 알았던 백순대볶음이었기에 거부한다고 해서 1도 타격이 없다. 오히려 에너지를 쏟지 않은 된장찌개 두부 조합을 너무나 맛있게 먹고 있어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저녁 진짜 맛있었어. 두부랑 된장찌개랑 진짜 간이 딱 맞았어."
엄마의 요리에 칭찬까지 해 준다. 그래, 이게 식탁 위의 행복이지. 애써 노력하고 들이민 메뉴는 거부당하고, 이렇게 마음 편히 나 먹을 거 먼저 챙기고 나중에 챙겨도 따봉을 받는 행복한 저녁. 역시 역발상은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훌륭한 기술이다.
그럼, 내일은 어떤 메뉴를 준비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