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달린 책방지기'가 되다
혼자 여행을 떠났다. 무려 제주로.
이 날씨 황금기에 평일 여행은 원래라면 무리지만 올해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또 나름의 용기도 내어 여행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혼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늘 함께 여행했던 가족들이 있기에. 원래는 아이들과 함께 떠나볼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신랑이 슬쩍 던져줬다.
"혼자 가~"
정말? 그래도 될까? 그래, 덥썩 물어버렸다. 처음에는 해외를 생각했었다. 결혼 전에는 해외여행도 꽤나 즐겼고, 심지어 혼자 돌아다니는 것에도 겁이 없었다. 그 때를 생각하니 가까운 일본도 좋고, 머나먼 유럽이나 미주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계획을 하면 할 수록 겁이 났다. 혼자?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혹시나 심심하면 어쩌지? 두고 온 가족들도 생각날 것 같고, 괜히 말도 안 통하는데 심심하면 답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또 합리화) 그래서 국내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혼자 제주여행을 시작했다.
1인 숙소를 찾아 보는데 좋은 곳이 너무 많았다. 특히나 '북스테이'. 공용공간에 책이 한 가득이고 각 객실 역시 필요한 것(침대, 작은 테이블과 의자, 개별 화장실)만 간단히 있는 그런 곳.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객실 정비 시간에 밖에서 나의 제주 여행을 즐기다가 숙소로 돌아오면 책을 한 가득 쌓아두고 잘 때까지 책을 읽었다. 그러려고 가져간 책, 그리고 책방구경을 하며 구입한 책들, 숙소에 비치된 책들을 욕심내 침대 옆에 쌓아두었다. 다 못 읽는다고 해도 좋았다. 쌓여있는 읽을 예정인 그것들을 보면.
낮에는 혼자 뭘했냐고? 그냥 있었다. 역시 옆에 책을 쌓아둔 채. 어디서? 차에서.
렌트카를 받아들고 제일 먼저 한 것이 '뒷좌석세팅'이었다. '바퀴달린 책방'을 만들었다. 지금부터 나의 '바퀴달린 책방'의 준비물을 쓸데없이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 챙겨 간 것 : 작은 보냉백, 보온병, 텀블러, 미니선풍기, 보조배터리, 독서등, 블루투스 스피커 그리고 담요
- 가서 산 것 : 스펀지매트(5000), 접이식 테이블(5000), 쿠션인형(5000)
렌트카를 인수해서 다이소에 들러 위의 세 가지를 구입한 후, 해안도로를 달려 한적한 곳에 주차를 했다. 하루 이틀 있어보니 보통 어촌계공동작업장 근처는 한가했다.(요즘 한정일지도) 트렁크를 열고 뒷좌석을 접었다. 조수석도 접었다. 운전석만 좌석으로 놔두고 다 접었다. 그리고 구입한 매트를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었다. (폭신한 것을 좋아하고 등허리가 배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정도로는 절대 안된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차박'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테이블도 펼쳐두고, 책도 올려보고 그 근처에 귀여운 망고 쿠션인형까지 놓아두니 꽤 괜찮았다.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나의 제주여행은 바퀴달린 책방과 계속 함께였다.
첫번째 바퀴달린 책방지는 '함덕 서우봉 주차장'. 주차장 제일 안쪽 구석, 서우봉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가 있었다. 엉덩이를 열고 그 자리에서 간단히 점심도 먹고, 챙겨간 드립백으로 커피도 내려 마셨다. 블루투스 스피커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바다에선 시원한 바람이 '바퀴달린 책방'에 찾아와 주었다. 바닷바람이 한 번 나와보라며 나를 유혹하면 읽던 책을 내려두고 바다를 걷고 서우봉에 올랐다.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했을 터인데, 이 첫번째 책방지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이렇게 하룻밤 자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가야 할 시간이 되어 머뭇머뭇 자리를 떴다. 자리를 뜨고 얼마 되지 않아 온다던 제주 장맛비가 쏟아졌다. 무섭게 쏟아지다가 또 어느 순간 잦아들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제주날씨라더니 진짜 그랬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려다가 또 호기심이 생겼다. 해가 진 후의 '바퀴달린 책방'은 어떤 느낌일까?저녁 먹고 들어가는 길에 근처 안전한 곳에 그렇지만 엉덩이 쪽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운치있는 그런 곳에 차를 세웠다. 비가 와서 트렁크를 아주 살짝만 열었다. 빗소리와 시원한 공기바람만 책방으로 들어올 정도로.
챙겨간 독서등은 유용했다. 배를 깔고 엎드려 과자와 탄산수를 야금야금 집어먹으며(운전자라 맥주를 못 마시는 제 조금 아쉬웠다. 하하.) 얇은 책 한 권을 끝내고 숙소로 들어갔다. 이렇게 두번째 바퀴달린 책방지도 즐거웠다.
그리고 세번째 바퀴달린 책방지는 '코난비치'. 객실정비 시간 때문에 어짜피 나가야 했는데, 준비가 일찍 끝나 10시 조금 넘은 시간부터 나는 제주동쪽의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어제 갔던 함덕서우봉 주차장이 너무 좋았기에 다시 그리로 갈까 하다가 '어? 여기 괜찮은데?' 하고 멈추었다. 그곳이 코난비치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어서 여기가 핫한 곳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주차하고 보니 그곳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근처로 차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1등으로 도착해 내 입맛대로 주차한 내 자리는 오늘도 명당이었다.
아, 날씨. 어제 밤 쏟아치던 비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아침에 잦아드는가 싶더니, 내가 숙소에서 나갈 채비를 할 때는 이미 그쳐있었다. 그냥 흐림 수준이었다. 간간히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긴 했지만 맑아질 기미는 없었다. 바퀴달린 책방은 살짝은 흐린 코난비치 앞에 OPEN 했다.(숙소에서 빌려온 추억의) 만화책도 읽고, 있어보이는 소설책도 읽고 글자에 지루해지면 바다를 바라봤다. 바람에 빙빙도는 풍차멍도 하고 푸르디푸른 제주바다의 일렁임도 눈으로 쫓았다. 그런데 또 나에게 선물같은 햇살이 왔다. 파아란 하늘이 나타났다. 흐림은 없었다. 쨍쨍함이 왔다. 이 정도면 하늘이 나에게 상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거 같네, 이왕 이렇게 떠나왔으니 최대한으로 누리고 가. 감사합니다, 정말. 앞으로 며칠 더 남은 여행기간에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해도 정말 슬퍼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정도로 첫 절반이 너무 성공적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제주여행, PART1.
왜 PART1 이냐고?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코난비치' 앞의 '바퀴달린 책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시 책방 바깥을 내다보니 파랬던 하늘은 다시 구름으로 가려졌고, 옥빛바다는 옥빛을 살짝 머금은 짙푸른 바다색으로 바뀌어 있다. 역시 제주날씨는 시시각각 변화무쌍하다. 그러고보니 오전에 차있던 물이 다 빠져 모래밭이 되어 있네. 다섯시간을 있었다. 한 시간 후에 이곳을 떠날 예정이다.
내일 객실정비 시간에는 어디에 '바퀴달린 책방'을 OPEN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