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을 깨우는 오늘의 여름비
쏴아아 -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후텁한 공기가 예고편이었나보다. 쏟아질까 그냥 이 공기로 머무르다 지나갈까 궁금했는데 후드득 후드득 쏴아 - 비가 쏟아져 내린다. 오늘 저녁은 해물파전이다. 냉동실에 오징어가 있던가? 집에 가는 길에 쪽파와 청양고추를 조금 사서 들어가야겠다. 막걸리는 두병정도는 집어들어야지. 다시 사러 나오는 건 질색이니까. 그럼 세병인가?
흐뭇하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여름비를 감상한다. 운치 있는 처마는 없지만 건물 끝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따라 내려가본다. 그 물줄기를 따라 눈길을 발 아래 어딘가로 떨구어보니 어느덧 생긴 물웅덩이가 보인다. 빗소리와 함께 하니 그 속에서 퍼지는 동그란 파동이 음악, 멜로디, 리듬, 하나의 선율같다. 빗소리가 이렇게 좋았던가. 후텁한 공기도 시원한 비와 함께 쓸려 내려간 듯 하다.
글을 쓰게 되니 좋은 점이 있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기억 저편에 잊혀져있던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언제였더라, 누구와 함께였더라, 그 때의 정취는 어땠던가. 얽혀있던 기억의 타래가 사르르 풀려 그 날의 기운이 나에게 닿을 때 무척 기분이 좋다. 오늘의 여름비를 가만히 보다 보니 운치 없던 건물 끝 물줄기와 동그란 흙탕물 물웅덩이가 나를 2011년의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로 데려갔다.
사회 초년생이던 내가 동료들과 함께 야유회 겸 1박 여행을 떠났다. 속초에서 하룻밤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단체버스는 우리를 설악산의 백담사로 내려주었다. 이미 그 전날 낙산사도 찍고 온 터라 그리고 전날 즐거운 저녁식사를 즐긴(?) 뒤라 왜 굳이 한 곳을 더 찍고 가는지 투덜대고 있었다. 비 오는데 등산이 왠말이냐며. 그런데 그 1박 직장야유회의 가장 좋았던 순간은 백담사였다. 토독토독 내리는 비에 처마 단청 끝에 걸린 여름비. 설악산의 상쾌한 초록이 촉촉한 여름비에 스며들던 그 공기, 풀내음. 숙취가 덜 풀렸던 걸까? 분명히 단체관광이었는데 왜 혼자였던 것 같지? 그 날 이후로 사실 나에게 백담사는 특별한 사찰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백담사에 딱 한 번 더 가보았다. 봄이었나 가을이었나 기억은 나지 않는데, 날이 아주 좋았다. 연둣빛의 풀이 반짝반짝했고, 예쁜 꽃들도 산길 여기저기 활짝 펴 있었다. 그렇지만 그 날의 백담사는 내 기억 속 백담사는 아니었다. 기대하고 올라갔는데 그냥 여느 사찰이었다.
지금 오늘 내 눈앞에 내리고 있는 여름비 덕분에 다시 한 번 나의 백담사에 다녀올 수 있었다. 촉촉하게 감성에 젖어든 여름이다.
여름비를 보고 작년에 썼던 글을 떠올렸다. 그리고 옮겼다. 하나더, 다음주 월요일에 연재할 시를 떠올렸다. 서랍에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꺼내어 본다. 여름비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