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나무그늘 아래, 단단한 바위 의자 하나
"여보, 안 더워?"
"응, 괜찮아. 오늘은 여보 그늘이 좋은데?"
"그래? 오늘은 바람이 좀 덜 부는 거 같은데. 난 좀 덥다."
"원래도 땀쟁이더니, 지금도 그러냐?"
"그러게."
쏴아아 -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쏴- 시원하게 불어온다. 저기 언덕 아래에서 SUV 한 대,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온다. 근처 공터에 멈추어 시동이 꺼지고 얼마 후, 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아이들이 뛰쳐나온다.
"할머니이~"
"할아버지이~"
"아이구, 하늘이는 그 새 키가 훌쩍 컸네."
"바다랑 호수는 어떻고, 앞니 빠진 거 아냐?"
"올 때마다 이렇게 쑥쑥 자라있네. 얘네들 세월도 금방 가나봐."
"이렇게 있어도 시간은 잘 간다, 그지?"
두 대의 차에서 나누어 내린 어른 넷과 아이 다섯은 언덕 위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펼치고 테이블과 캠핑의자를 꺼내더니 피크닉 준비를 시작한다. 아이들은 나무에 걸린 그네를 나누어타기도 하고 살짝 경사진 듯한 바위등을 미끄럼틀 타듯 놀기도 하며 선선한 피크닉을 즐긴다.
"엄마, 아빠. 잘 있었어요? 뭐, 오늘은 맥주 한 잔 드려?"
"캬, 맥주 좋지. 여보? 여보는 첫 잔은 소맥인가? 얘들이 알아서 잘 타줄라나?"
"나랑 마신 세월이 얼만데, 첫 잔은 소맥 주겠지!"
"현이가 타줘야 되는데, 소맥은 현오보다 현이가 타는게 맛있는데..."
"오빠, 엄마랑 아빠는 첫잔 소맥이거든! 줘봐. 내가 타서 드릴테니까."
현이는 능숙하게 소맥 두잔을 말아 나무 밑동에 한 잔, 바위 밑동에 한 잔 살포시 뿌려준다.
"아, 시원해. 역시 첫잔은 소맥이야."
"얼마만의 소맥이냐. 야, 김현이. 너 좀 자주와라. 여름에 목 좀 축이자."
"여기가 어디라고 자주와. 계절마다 한 번씩 오는 것도 대단하다."
"으이구, 아들 딸 사랑은 진짜 아빠다, 아빠."
어느 날,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눈을 떴다. 어딘지 모를 곳이었다. 어리둥절 여기가 어딘지 둘러보았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내 발 아래 파릇파릇 흙잔디,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일어났어?"
분명 신랑의 목소리인데, 신랑은 보이지 않는다.
"여보? 어딨어?"
"나 여기. 여보 아래에."
바위? 저 바위? 여보라고? 그럼 나는?
"놀랐지? 나도 처음엔 놀랐는데, 그게 그렇더라고. 그냥 받아들이게 이야기해주면 나는 바위. 여보는 지금 나무야. 우리는 다시 태어난 거지."
그렇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이전 세상을 떠나왔고, 이렇게 나란히 나무와 바위가 되어 이 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경치 좋은 곳에 나란히 자리 잡고 봄의 따스함도 여름의 에너지도 가을의 선선함도 겨울의 포근함도 함께 느끼며 다시 함께 하고 있다. 죽어서도 다시 만나냐며 기겁 질색을 했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서 좋다. 저 먼 바다를 바라보다 저 아래 들판을 내려보다 그렇게 아무 얘기를 하지 않고 있어도 편안하다. 그러다 갑자기 불어오는 간지러운 바람을 느끼면서 배시시 웃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깔깔깔 웃어대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자연으로 살아가는 지금이 편안하다. 그러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날은 그 기쁨이 배가 된다.
나의 아이들아,
각자의 가정을 예쁘게 꾸미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이렇게 가만히라도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엄마아빠의 기쁨이야. 이렇게 한 번씩 찾아와 훌쩍 커버린 손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우리가 떠남을 슬퍼하지 않고 웃으며 소맥 한 잔 말아 부어주는 아들과 딸이 있음이 행복이야.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시원한 나무그늘과 단단한 바위의자를 내어주는 것이지. 일상을 떠나 소풍 온 듯 이곳에서 이렇게 함께하고 있는 듯한 이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길 바란다. 점점 더 오는 시간이 뜸해져도 괜찮아. 하지만 아예 오지도 않는 건 좀 서운할 것 같긴해. 너희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랑 아빠는 이곳에서 움직일 수가 없거든. 새가 되었다면 구름이 되었다면 우리가 찾아갈텐데, 엄마는 나무가 되었고, 아빠는 바위가 되었네. 도시에서의 너희의 생활은 어떠니? 물론 잘 하고 있겠지만,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있을거야. 그럴 때 멀지 않은 이곳이 있다는 걸 떠올려줘.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그냥 이 나무그늘 아래, 바위에 가만히 앉아서 저 먼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다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야. 아쉬운 건 딱 하나겠네. 운전해서 가야하니 술은 안된다. 무알콜은 그 맛이 또 아니라 안되니까. 그냥 술은 여기서 마음 정리하고 돌아가서 마시도록. 아니, 이렇게 죽어서도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게되네. 미안해. 이게 어쩔 수 없는 엄마는 엄마인가보다. 또 말하면 이제 잔소리될 것 같은데? 애들 공부는 잘하니, 아니다, 공부타령 하지말고 잘 놀게해줘라. 너희 어릴 때 얼마나 놀았는지 아니? 전국 방방곳곳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아주 유명했어. 등등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아니 이제 할 수가 없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아무튼. 오늘 와줘서 고마워. 다음엔 또 언제 올 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올 때는 맥주는 카스로 사와라. 엄마랑 아빠는 '돌(고)돌(아)카스' 파다.
여름이라 해가 길다. 어스름한 하늘, 뉘엿뉘엿 기우는 붉은 해가 보일 즘에야 아이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차에 짐을 나누어 싣는다. 두 가족은 서로 아쉬운 인사를 건네며 각자의 차로 언덕길을 내려간다. 그 차들의 엉덩이가 사라질 때쯤 하늘엔 어둠이 내려앉고 그 어둠이 익숙해지자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저 별까지 보고 갔음 좋았을걸."
"뭘 또 아쉬워하고 그래, 오늘 오래 잘 놀다 갔구만."
"해주는 게 없어서 그런가 오는 모습은 반갑고 가는 뒷꽁무니는 더 반갑다던 말이 우리한텐 안 맞네."
"그 말이 또 그렇게 되나?"
"다음엔 또 언제 오려나?"
다음에 올 때까지 나는 또 니네 아빠랑 잘 놀고 있을게. 다음 계절에 또 보자. 아니 한 계절정도는 건너뛰어도 괜찮을 것 같아.
피비 할머니는 숲에서의 시간을 지낸 후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새가 되어 자유로이 날아갑니다.
할머니가 날아간 곳은 또 자식들 근처였네요.
하지만 할머니의 시간은 또 달랐으리라 생각됩니다.
나 역시 언젠간 밤에 숲에서의 시간을 보낼테고
남겨진 이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한다
남겨진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이야기를 상상하여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