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더 사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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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OO년 O월 O일 O시 O분, 사망하셨습니다.
사망선고,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행위. 한 사람의 인생이 끝이 났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옆으로 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인기척, 아니 그냥 기척이 느껴진다. 그 기척이 나에게 말을 한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당신은 지금 공식적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당신은 이제 누군가의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기억으로서의 존재가 된 누구나 3일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태어난 날을 축하하며 받는 선물도 있는데 인생을 마무리한 지금, 잘 살아내었다고 축하하는 선물도 받아야지요. 사망선고를 받은 지금부터 72시간 동안 당신은 지난 당신의 인생에서 하지 못하였던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가능합니다. 그 72시간은 사망한 그 순간부터 3일을 되돌아 갈 수도 있고, 당신의 인생 그 어디쯤 어느 순간으로도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시간 단위로 살짝씩 쪼개어 쓸 수도 있습니다. 원래는 통으로 밖에 쓸 수 없었는데 다들 아쉬워하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바뀌었습니다. 통으로 쓰던 쪼개어 쓰던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아, 그렇지만 주의할 점은 사망선고의 시간이 바뀌도록 무언가를 해도 사망선고이 시간에는 일초의 오차도 생기지 않습니다. 또한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타인의 인생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직업이나 배우자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물론 로또번호를 알려주더라도 로또에 당첨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이 72시간의 선물은 인생을 잘 살아온 당신에게 당신의 시간을, 당신의 세월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하는 누군가의 기억 속 존재가 된 당신만을 위한 선물입니다.
선물이라. 72시간이라.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만 하다가 시간 다 가겠네. 일단 생각나는 것부터 해보자.
첫번째 선물 사용.
"일나라! 학교 안 갈끼가! 밥도 묵고 가게. 스쿨버스 놓치면 또 저기 XX아파트까지 태워줘야 된다이가. 오늘은 마 쫌 그냥 집 앞에서 타고 가라!"
엄마다. '고등학생인 나'의 엄마다. 시계를 보니 6시 10분. 통학버스를 타기 약 40분 전이다. 그 때의 나였으면 들은체 만체 밍기적밍기적 이불 베개를 부여잡고 10분 넘게 대치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가 깨끗이 씻고 나온다.
"엄마, 밥!"
매우 의아한 얼굴을 잠시 내비친 나의 엄마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내 앞에 내려놓는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감사인사를 한 뒤 한 숟갈 한 젓갈 꼭꼭 씹어 아침을 먹는다. 그렇게 매일같이 차려줬던 따뜻한 아침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뚝딱 비우고 엄지 손가락을 척! 내보이고 집을 나선다. 그 시절의 나는 몰랐었다. 언젠가 엄마가 그랬다. 남들은 모르는 본인의 뿌듯 포인트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나의 아침밥이었다는 걸. 고등학교 때 나의 아침상은 매일 따뜻했다는 걸.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 밥상을 참 하찮게 여겼었다. 엄마가 된 나 역시 그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그 대단한 일을 하셨는데 그걸 나는 전혀 모르고 감사해하지도 않고 심지어 먹는둥 마는둥 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꼭 이 시간으로 돌아와 그 아침을 꼭꼭 씹어 먹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아, 엄마! 오늘 아빠 일찍 오신대요?" "아마도? 모르겠는데?" "알겠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작은 케이크라도 하나 사갖고 들어와야겠다. 무슨 날은 아니지만(시간을 돌아온 나에게는 무슨 날이지만) 그냥 기분좋은 일 있다고 그냥 케이크가 먹고싶었다고 축하파티나 해야지.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꼭 안아드려야지. 오글거려. 그래도 뭐 '누군가의 기억 속 존재인 나'는 이미 다 오그라들어있는데 뭐. 그러면 이제 등교를 해서 소녀소녀하게 고등학생 시간을 좀 즐겨볼까? 나의 그 첫사랑 선배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일까나. 아 그냥 그 쪽은 그냥 판타지로 남겨둘까.
두번째 선물 살짝 사용.
"20XX년 X월 X일, X시. 종'지현'식에 초대합니다."
사망선고를 받는 날로부터 딱 1년 하고도 1개월 전으로 돌아가 본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어마어마하다. 그냥 원하기만 하면 이런 초대장 쯤은 얼마든지 전달된다. 이 메시지를 받고 마음이 불편하려나. 얘는 왜 이런 걸 나한테 보내냐며 그냥 휴지통으로 보낼 수도 있겠다. 상처받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의 메시지를 이렇게 쉽게 넘기기도 했으니까. 갑자기 여기저기서 메시지가 온다. 무슨 일 있냐며. 갑자기 무슨 종'지현'식이냐며. 대충 얼버무려 그냥 다들 만나고 싶어서 플렉스 한 번 해봤다고 한 달 뒤에 와서 즐겁게 먹고 마시라며 웃으며 답을 한다. 어찌됐든 이렇게 살짝 초대장을 보내놓고 종'지현'식의 시간으로 날아가본다. 누가 와 있으려나.
두번째 선물 진짜 사용.
20XX년 X월 X일 X시이다. 종'지현'식.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와 주었다. 저 사람이 왔다고? 하는 뜬금없는 사람도 있지만 그마저도 너무나 반갑고 감사했다. 또 정말 오래토록 보지 못해 그리웠던 사람도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오늘의 종'지현'식이 참 마음에 든다. 종'지현'식은 나의 인생을 바꾸지도 오늘 온 사람들의 인생도 어느 하나 바꿀 수 없다. 다만 나의 기억 속에 그들의 기억 속에 조금은 아주 살짝은 깊이를 더한 짙은 '누군가의 기억으로서의 존재'가 될 수 있겠지. 이렇게 마주보고 웃으며 눈인사 손인사 몸인사를 하는 찰나의 시간으로도 말이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장례식에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직접 할 수 없다. 이렇게 일년 전 종'지현'식을 맞이하여 나의 눈과 입과 손으로 인사를 하고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세번째 선물 사용.
마지막 24시간. 나의 죽음 전 하루. 나의 집으로 간다. 나의 방으로 간다. 책상에 앉아 나의 방을 둘러본다. 나의 부엌으로 가 손때 묻은 나의 주방기기들을 만져본다. "죽기 전 딱 하나만 먹을 수 있다면 무슨 음식을 먹을거야?" 젊은 시절 참 많이도 들어봤고 참 많이도 해봤던 질문이다. 이 질문이 이렇게 중요한 질문이었다니. 난 지금 무슨 음식을 먹어야 하나 생각해본다. 흰쌀밥에 파김치 그리고 조미김, 아 청량고추 다져넣은 오징어젓갈도 준비해두고(아니 무슨 짠맛대잔치냐...) 보글보글 삼삼한 야채육수낸 된장찌개를 뚝배기에 끓여본다. 폭탄계란찜도 할테다. 설거지 생각이나 남은 음식물은 난 모르겠다. 좀 있으면 사망선고 받는데 뭐 누군가는 하겠지. 음식 남기면 지옥간다는데 하늘님, 하루전날은 좀 봐주세요. 다 먹고 죽고싶어요. 그렇게 한참을 나를 위한 요리를 하며 주방을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정갈한 식탁을 만들어 자리에 앉는다. 건강하게 곡물로 밥을 지어먹으라 그렇게 들었지만 제일 맛있는 건 역시 갓 지은 백미밥이다. 이걸 먹고 죽을 수 있다니 난 행복하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통에 설거지를 한 가득 쌓아두고 다시 깨끗해진 식탁에 조용히 펜과 종이를 꺼내 앉아본다.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다. 내용은 딱히 없다. 그냥 고마웠다, 사랑한다, 덕분에 행복하고 즐거웠다.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나는 슬프지 않다. 충분히 행복하게 이 인생 보내고 가니 남은 당신들도 행복했던 나와의 추억을 웃으며 기억하고 웃으며 마저 살아내거라. 인사를 하고 펜을 내려둔다. 그리고 나의 침대로 가 폭신한 침구 속으로 몸을 뉘여본다. 72시간이 끝나간다. 충분한가? 충분하다. 없는 줄 알았던 72시간이 더해진 것이 아닌가. 정말 선물이구나, 나의 72시간. 오늘은 정말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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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OO년 O월 O+3일 O시 O분, 사망하셨습니다.
나에게 딱 3일 더 사는 선물이 주어진다면? 오래오래 할아버지처럼 오래오래 3일씩 선물 받아 쌓이는 시간이 아닌 딱 3일, 정말 딱 3일만 더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아니 언제로 돌아가보고 싶을까요? 정말 선물같은 그 72시간을 주제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