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때는 소녀였단다
"할머니,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래요."
이제 제법 숙녀 티가 나는 이린이가 내 옆에 와 쪼그리고 앉는다. 시원한 아이스커피와 달콤한 케이크를 들고. 할머니가 감주와 한과만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되지. 할매입맛 이전에 나도 달달구리만을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구.
"할머니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어. 바람이 좋네. 여름 끝났나보다."
"그럼, 다음주가 추석인걸."
"엄마랑 아빠랑 뭐하니?"
"삼촌이랑 숙모랑 저녁에 뭐할지 얘기하던데요?"
"뭐한다니?"
"몰라요, 또 우리랑 할머니랑 놔두고 친구들 만나서 놀다 오겠지."
"빨리 나가라 그래라. 우리도 좀 조용하게 쉬게."
"그니까요, 얼른 나가야 우리도 좀 우리 할 거 하지."
"뭐할건데?"
"알면서ㅋㅋㅋㅋㅋㅋ"
모든 소녀들은 다 거치는 과업같은 것일까. 이린이도 요즘 TV에 나오는 어떤 가수에 빠져 그이가 나오는 영상을 무한 검색 무한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반가운 것이 그이가 최근 리메이크 앨범을 냈는데, 그게 마침 또 나의 추억의 그룹, god의 노래이다. 나의 오래된 다락방 상자에서 god의 앨범과 응원굿즈들을 우연히 발견한 이린이가 관심을 보이며 나에게 이것저것 묻더니 이번엔 그 시절 노래들을 섭렵했다며 우리 집에 오자마자 내 옆에 와 조잘조잘 떠든다.
"할머니는 그 때 왜 god 좋아했어? 보니까 HOT랑 젝스키스, 신화, 클릭비 막 엄청 더 잘 생기고 그런 가수 많던데?"
"몰라. 그냥 그 땐 god가 좋았어. 좋은 노래도 있고, 편안한 노래도 있고, 신나는 노래도 있고. 그러고보니 그 때 할머니도 참 에너지 넘쳤네. 쓸데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쓸데없는데 왜 그랬나몰라."
"왜, 왜? 뭐했는데?"
2001년 12월 31일 자정을 앞둔 깜깜한 밤. 집에는 나 혼자. 아무도 없다. 바깥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고층의 아파트는 바닷바람에 휘청거린다.(아파트 설계상 너무 거센 바람에는 조금 흔들리게 시공되어야 한다고 그 때는 들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려 그냥 그렇게 뇌리에 박힌 사실인지 실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튼 엄마와 아빠와 동생은 연말 모임이 있었는지 집에 없었고, 나는 연말 시상식을 봐야 한다며 오늘도 대상을 받으면 무려 3관왕이라며 이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 수 없다며 우겨 집에 남았다. 그 해 god는 '거짓말'이라는 노래로 연말 시상식을 휩쓸었다. 그 때 아파트가 휘청인게 바람때문이었는지 나의 동동거린 발구름 때문이었는지.
나의 팬심은 마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의 가수에 대한 사랑을 널리 널리 알리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들을 좋아하는 나를 스스로 인정하는 그런 느낌일까.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god의 '손호영'이라는 멤버의 생일이에요. 기쁜 날이에요. 이 껌 하나 받아가.' 등교 전 나와 함께하는 팬동지들인 하늘색 친구들과 함께 교문 근처를 배회하며 보이는 친구마다 껌을 나눠준다. 그 껌은 '손호영' 얼굴과 함께 생일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껌종이로 덮여있다. 최애 멤버의 생일 뿐 아니라 다른 멤버의 생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최애멤버 탄생일에 나와 함께 해준 하늘색 친구의 최애 멤버의 생일에도 함께 해야지. 그게 하늘색 의리이다.
주황색 친구들, 보라색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멤버의 생일 날 학교 주변을 둘러싼 벽돌 울타리에는 생일 포스터가 붙는다. 늘 늦잠 자고 일어나 종치는 순간 교문을 통과하던 그들이 그 날만큼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되어 새벽녘 어스름에 교문 울타리 기둥마다 포스터를 붙이고 사라져있다. (나 역시 붙이다가 걸려서 혼난 적이 있더랬지. 도망치고 나서 친구랑 어찌나 깔깔거리다가 또 왜 붙이면 안되냐고 분노하고 다시 또 꺄르르 대고)
월간 잡지가 발행되는 다음 날이면, 교실 곳곳에서는 오리고 붙이고 찢고 나누고 활발한 공작활동이 벌어진다. 같은 페이지에 쟁탈전을 보이다 같은 잡지를 가진 다른 가수의 팬에게 후다닥 달려가 울며 사정하는 아이들. 각각 다른 잡지 한 권씩 사서 이 페이지는 내가 가지고 저 페이지는 네가 가지고, 나 이 가수 필요없는데 너 줄까 선심도 쓰고, 저 친구 잡지 페이지 갖고 싶어서 거래도 하고. 이런 소녀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어제 있었던 야구의 승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여학생들의 눈에 더 한심스러운) 남학생들의 함께 있는 그리운 교실.
"할머니 완전 빠순이었네."
"너 빠순이가 뭔지 알아?"
"그럼, 오빠순이 줄임말 아니야? 덕후 이런거 같던데? 학교에서 배웠어."
"학교에서 그런 단어도 가르쳐줘?"
"어 신조어 공부하는데, 매 시절 신조어는 있어왔다 뭐 그런거 얘기하면서 선생님이 알려줬어."
"재밌네. 아니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노래 들어보고 왔어? 무슨 노래가 맘에 들디?"
"아, 난 이번에........."
나의 오빠들을 공유하며 이린이와 나는 과거로의 음악여행을 떠났다.
중학교 1학년 이린이와 함께 앉은 나도 지금은 불이 다 꺼진 어두운 거실에서 티비만 켜놓고 누가 깰 새라 조용히 '거짓말'을 따라부르던 중학교 1학년 소녀가 되어.
잘가~ (가지마), 행복해 ~ (떠나지마), 나를 잊어줘 잊고 살아가줘 (나를 잊지마).
나는(그래 나는), 괜찮아(아프잖아), 내걱정은 하지말고 떠나가(제발 가지마)
g.o.d. 짱!!!!!!
새롬이와 오래오래할아버지. 새롬이는아주 오래전부터 3일 더 사는 선물을 받아 오래오래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어요. 오랜 세월을 겪은 할아버지는 아는 것도 경험한 것도 많겠죠? 새롬이는 오래오래 할아버지와의 많은 교감을 하며 세대 간 소통을 하고 또 본인이 배운 것을 익혀 새로 태어난 동생 오래오래에게도 전해줍니다.
3일 더 사는 선물, 선물일 수도 있지만 순리를 거슬러 오래오래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이제 그 선물은 그만 받고 다른 선물을 받고 싶다고 말하지요.
오늘은 내가 오래오래 할아버지처럼 오래오래 살아내고 났을 때, 나의 손주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 아이와 내가 교감할 수 있는 대화 내용을 상상해봅니다.
지난 달 마지막주 토요일, 나는 이 오빠들의 25주년 콘서트에 다녀왔다. 나의 20년, 25년 전으로 타임 슬립하여 소녀가 되어본 지난 달의 나. 생각만으로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다. 오늘 나 에너지 넘치게 하루를 보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