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만나는 '천지', 배울 것 '천지'
새로운 해가 밝아오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심지어 입춘이란다. 1월의 마지막 주가 연휴였던지라 해야 할 것을 먼저 하느라 읽는 시간이 부족했다. 읽다가 멈추고 읽다가 덮어둔 책도 많았다. 그러다 지난 주말 아파트 작은 도서관 봉사를 하다가 우연히(?) 작년 말에 재미있게 읽었던 '페인트', '셰이커'를 쓰신 이희영 작가님의 책을 발견했다. '베아'라는 책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내용인가 싶어 펼쳤다가 그 옆에 있는 '챌린지 블루'까지 대여해왔다.(이 책은 아직 펼치지 않았다) 집어든 책을 단숨에 절반가량 읽어버렸다.
표지가 굉장히 판타지스럽다. 홀로그램 표지가 아주 번쩍이고 어딘가 음산하기까지 한 기괴한 숲의 모습이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의아해하며 시작했다. 책의 세계관부터가 그리고 인물들의 이름부터가 이미 판타지라 하나씩 파악하며 읽기 시작했다. '비스족'의 이야기이다. 왕인 '쿤', 이를 수호하는 전사 '솔'이라는 직책이 있다. 그리고 '쿤'의 후계자인 '베아', '솔'의 아들인 '타이', '베아'와 '타이'의 친구이자 '타이'의 라이벌('타이'에 대적할만한 전사이기에 '솔'의 신임을 받는) '울피'가 주요 인물이다.
이 땅, 실바에서 가장 풍요를 누리고 있는 '비스족'. (그 풍요와 평화는 과거의 전쟁으로 그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그런데 어느날 실바 외곽에서 미약하게나마 겨우 부족을 만들어 살던 '피프족'이 하늘에서 빛을 따라 내려온 새로운 왕을 맞이하고 죽음의 숲 '케이브'를 건너 전설로만 내려오던 '사라아'로 갔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비스족'의 평화가 힘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이 가진 힘(전쟁의 기술과 무력)을 믿고 지키고 싶어하는 '솔'과 달리 '쿤'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바람과 비와 구름을 다스린다는 '피프족'의 새 왕 '탄'에게 그 지혜를 얻고 싶어한다. 자신들의 강점과 그들의 강점을 나누고 싶어한다. 하지만 '피프족'과 '탄' 그리고 '사라아'를 둘러싼 소문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실제로 '피프족'이 새로운 왕을 만났는지도 알 수 없고, 그들이 진짜 '사라아'를 찾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베아'가 자진해서 그곳에 가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후계자로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정에 '타이'가 함께 하게 된다. '베아'와 '타이'가 죽음의 숲 '케이브'를 건너는 이야기. 그리고 그 여정에서의 '베아'의 성장이 주 스토리였다. 책을 읽으면서 베아가 이 모험을 통해 불안했던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진정으로 단단해지며 '쿤'의 후계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것인가 하며 그녀를 함께 응원하고 이를 보여주는 멋진 문구도 끄덕이며 읽었다.
기발한 상상으로 죽음의 숲 '케이브'가 표현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그들이 맞닥뜨리는 위험과 극복이 계속된다. 그 결과는 직접 읽어보시길. 이미 스포가 한 가득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남겨두고자 한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을 읽는데 충격을 받았다. 자, 다시 한 번 위의 줄거리? 세계관? 을 설명한 나의 글을 읽어본다. 작은 따옴표로 표시한 직책과 배경과 이름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본다.
베아(bear), 타이(tiger), 죽음의 숲(cave), 비스족의 왕 쿤(kun), 피프족의 왕 탄(tan)_그는 비와 바람과 구름을 다스린다_그리고 죽음의 숲 케이브 안에서 베아는 어떤 기괴한 꽃의 열매를 마늘꽃 열매라 부르며 맛있게 먹고, 타이는 그 열매는 역겹다며 절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가 머릿속에 탁 하고 번쩍 하고 떠오른다. 피프족과 비스족이 만난다면, 탄과 쿤이 만나는 것. 대박. 이것이 소설의 세계관이구나. 잘 짜여진 스토리. 모르고 읽었으면 절대 몰랐을 그냥 지나쳤을 작가의 의도. 하지만 작가는 굳이 이를 드러내지 않고 '모르면 모르는대로 그냥 지나가세요.' 하고 흘려둔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읽으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내가 너무 부끄럽다. 괜히 분하다.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심지어 베아가 가지고 떠나는 검에는 황금빛 곰의 문양이, 타이가 가진 무기에는 은빛 호랑이 문양이 있다. 표지에도 곰 한 마리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 에잇. 왜 모른거야 왜!
그러고보니 페인트 때도 이희영 작가님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었다. 셰이커도 마찬가지. 작가님의 상상력이 부럽다. 아직 읽지 못한 '챌린지 블루'에는 어떤 기발한 것들이 숨어있을까.
1월 말에 제출했다던 나의 첫 동화 공모전 도전작도 살짝의 판타지가 들어간 내용이다. 정말 뻔하다. 에잇. 이름도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지어냈다. 이름에 어떤 의미를 넣을까 고민도 하지 않고 인물들의 이름, 배경들의 이름을 막 넣었다. 그러면 안됐다. 주인공의 이름에도, 배경이 되는 도시도 장소도 모두 의도가 있어야 한다. 또 한 번 머리를 친다. 다음 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천지'삐까리이다.(어릴 때 많이 썼던 사투리)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소설에서 또 하나를 얻어간다. 역시 이래서 끊임없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책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무궁무진한 세계가 있다. 천지(天地)가 있다. 쓰는 것 못지 않게 읽는 것도 중요하다.
읽을 세계는 아직 많다. 쌓여있다. 다시 읽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