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박스를 접는 마음

by 눙디

직장인들이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그 가벼운 발걸음 소리마저 잦아드는 시간.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발이 편한 운동화 끈을 묶으며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서, 나의 무거운 발걸음은 그 누구에게도 알아채지지 않는다.


그동안은 드문드문 찾아오는 의욕에 기대어 한 시간 남짓 빠르게 걷곤 했지만, 요즘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몸을 움직여 보려 애쓰는 중이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집 근처 낮은 산을 한 바퀴 돌고, 달이 뜬 이후에는 단지가 제법 큰 아파트 주변을 몇 바퀴씩 걷는다. 근래 며칠 동안은 아파트 둘레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걷거나, 슬로우 조깅을 이어가고 있다.


연일 이어지는 한파 때문인지, 아니면 밤 아홉 시라는 시간 때문인지 길 위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물다. 이따금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피우는 이들만 보일 뿐이다. 지난여름, 밤 열한 시가 넘어도 운동하는 사람들로 활기차던 그 길 위에서 함께 발을 맞추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혼자 걷는 길 위에서 문득, 조금은 쓸쓸해진다.


늦은 시간이라 길가의 작은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음식을 파는 곳들은 여전히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 덕분에 아주 어둡지만은 않은 길을 걸을 수 있어 마음 한편이 고맙다.


아파트 단지에는 분리수거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주택가나 상가는 도로변에 종량제 봉투와 재활용품을 내놓는다. 주로 밤 시간에 배출되다 보니, 밤에 활동하는 내 눈에는 늘 익숙하게 담기게 되는 풍경이다. 폐지를 수거하시는 어르신들이 손수레를 끌고 지나가시는데, 가끔 쓰레기 더미 속에 정리되지 않은 채 뒤섞인 박스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 수고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만 더 신경 써서 내놓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테이프조차 제거하지 않은 채 덩그러니 나뒹구는 다양한 크기의 상자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여기저기 흩어져 길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그런데 다음 날이면 신기하게도 길은 다시 말끔해져 있다. 누군가의 수고로운 손길이 한 번 더 닿았을 것을 생각하면,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풍경에 익숙해질 즈음, 유독 눈에 띄게 단정한 장면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건 어느 집에서 내놓은 걸까?' 하는 사소한 궁금증이 고개를 든다. 분명 마음결이 고운 사람일 거라고, 사소한 규칙도 소중히 여기는 다정한 사람일 거라고 혼자 짐작해 본다. 오늘도 그런 장면을 만났다.


언뜻 봐도 대여섯 개는 되어 보이는 두꺼운 박스들이 도로변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상자들은 모두 펼쳐진 채로, 마치 줄을 맞춘 듯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상가 건물 앞이라 어느 가게에서 나온 것일까 궁금해 슬쩍 살펴보니, 박스 위에는 '바른치킨'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고개를 들어 치킨집 안을 보니, 한 테이블에 오순도순 앉아 치킨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나는 치킨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가끔 식구들과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간편하게 주문해 먹곤 한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배달을 시키는 일이, 가끔은 괜히 민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워낙 많은 치킨 프랜차이즈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탓인지, 그 상호명은 내게 다소 생소했다.


박스를 이토록 가지런히 내놓은 손길에는 가져가시는 분을 향한 따뜻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그 단정한 마음을 헤아려 보니, 이곳의 사장님 또한 분명 올곧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분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장님의 매일이, 장사가 잘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타인의 배려에 마음이 훈훈해진 나는 이곳의 단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래도 내일 저녁은 치킨을 먹어야겠다. 배달 말고, 사장님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포장 주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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