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큰 길가에는 화려한 간판들로 빼곡한 건물들 사이에 유독 병원들이 촘촘하게 모여 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건물마다 내과 하나쯤은 꼭 자리 잡고 있다. 나도 그중 한 곳을 정해 꽤 오랫동안 다니고 있다. 2년에 한 번씩 받는 건강검진은 물론이고, 위나 대장 내시경을 할 때, 몸에 작은 이상이라도 느껴질 때면 가장 먼저 발길이 향하는 곳이다.
재작년 피검사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경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는 약 처방을 권했지만, 나는 식이요법과 체중 조절로 다시 관리해 보겠다고 호기롭게 말했었다. 홀수 연도에 태어난 나는 작년 말, 피할 수 없는 숙제처럼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가벼워진 몸으로 병원 문을 두드리고 싶어, 일 년 중 가장 늦은 12월로 예약을 잡았다.
여름부터 체중을 줄여보겠다며 마음을 먹었지만 변화는 생각보다 더뎠다. 한의원에서 처방받은 한약의 도움을 받고, 식단을 조절하며 침 치료와 운동을 병행했다. 운동이라 해봤자 하루 한 시간 남짓 빠르게 걷는 정도였지만, 평소 움직임이 거의 없던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활동량이 많아 살이 더 빨리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무기인 나는 그저 꾸준히, 나만의 속도로 살을 빼는 일에 집중했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태국 여행 중에도 철저히 식단을 조절했을 정도였다. 그 결과 꽤 많은 무게를 몸에서 덜어낼 수 있었고, 나는 위풍당당하게 12월의 검진을 마쳤다.
결과를 들으러 간 날, 가장 궁금했던 건 역시 콜레스테롤 수치였다. 의사는 몇 장의 결과지를 넘기더니 마지막 장에 적힌 수치를 가리켰다. 총 콜레스테롤 정상 범위는 200 미만이지만 결과는 204, 100 미만이어야 할 LDL 콜레스테롤은 141이었다. LDL 수치가 130을 넘으면 약 처방이 권고사항이라며 의사는 처방전을 써 주겠다고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지혈증 약은 한 번 먹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한다던데, 꼭 먹어야 하나요?"
의사는 본인도 약을 복용 중이라는 고백과 함께 말했다.
"추후 중풍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 드시는 게 유리합니다. 제가 환자분 상황이라도 먹을 것 같아요."
살을 빼면 수치도 당연히 좋아질 거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건만, 약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혼이 빠진 사람처럼 병원을 나섰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 집으로 오는 내내 기분은 끝없이 가라앉았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고지혈증', '콜레스테롤', 'LDL'을 검색했다. 수많은 글과 영상 속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의사들의 이야기를 만났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갈림길에 서 있었고, 의사들마다 소견도 조금씩 달랐다. 정보를 찾아가다 보니, 마치 짙은 안갯속에서 이정표를 발견한 것처럼 희미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활 습관을 바꿔 수치를 개선했다는 누군가의 사례를 보며, 나도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처방받은 약은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나의 식습관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나는 맵고 달고 짠 자극적인 맛을 좋아했고, 밥과 떡, 빵 같은 탄수화물과 튀긴 음식을 즐겼다. 스낵류 과자는 거의 매일 곁에 두고 살았다. 곧바로 실천에 들어갔다. 두 번 먹던 건 한 번으로, 하나를 다 먹던 건 반으로 줄였다. 무엇보다 튀긴 음식과는 거리를 두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의외로 그 결심은 한 달이 넘도록 단단히 지켜지고 있다. 평소 탄산음료나 사탕, 초콜렛, 아이스크림을 즐기지 않고 쌀밥만을 고집하지 않는 식성이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변수는 커피였다. 고압력과 고열로 추출한 커피에는 '카페스톨(Cafestol)'이라는 기름 성분이 있는데, 이것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카페에 가면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던 나에게 커피는 피해야 할 대상이었던 셈이다. 다행히 완전히 끊을 필요는 없었다. 종이 필터가 기름기를 걸러주는 드립 커피나, 제조 과정에서 성분이 대부분 제거되는 콜드브루와 인스턴트커피라는 대안이 있었다.
다음 변수는 유제품이었다. 매일 마시던 우유와 즐겨 먹던 그릭 요거트, 치즈 역시 포화지방으로 인해 수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지방 우유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우유는 두유로 바꾸고 요거트와 치즈는 잠시 멀리해 보기로 했다.
오래된 식습관을 단번에 완벽하게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날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몸에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독이 되는지를 조금은 알 게 되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내 몸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변화할 내 몸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면, 못 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조급해하지 않고 오늘 하루 나를 채우는 먹거리부터 하나씩 바꾸어 보려 한다. 서랍 속에 넣어둔 약 봉투를 영영 꺼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