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여행 프로그램을 마주치면,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고 어느새 TV 속 세상으로 자석처럼 이끌려 들어간다. 마치 나도 모르는 힘에 매료된 사람처럼 그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운 좋게 여러 편이 연속 방영되는 날이면,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2014년의 어느 날, 거실 TV에서는 EBS [세계테마기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의 여행지는 페루였다.
남미라는 대륙은 화면 너머로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묘한 에너지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화려한 색감의 의상들은 내 안의 엔도르핀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 낯선 이와도 금세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는 그들의 문화를 보고 있으면, 내 안에도 뜨거운 활기가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안갯속에 가려진 웅장한 석조 도시 '마추픽추'와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쿠스코'가 곧 화면에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들떠 있었다.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거실에서 이런 경관을 만날 수 있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프로그램 초반, 내레이션을 통해 여행자의 목소리를 먼저 듣게 되었고, 몇 차례 장면이 바뀐 뒤에야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시원스러운 이목구비를 지닌 그는, 옷차림에서부터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긴 비행 탓에 피곤할 법도 한데, 그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통의상을 입고 춤추는 무용수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더니 "같이 춤출래요?"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메고 있던 배낭을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그들과 손을 맞잡고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 지금 너무 신나!'라는 말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그를 보며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피어났다. 웃을 때 생기는 눈가의 주름이 유독 매력적이었는데, 방송을 지켜볼수록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시시때때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장거리 비행에 지친 순간에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요금을 제시받아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웃음으로 넘기는 여유가 있었다. 심지어 해발 고도가 높아 숨 쉬기 힘든 고산지대에서도 그는 웃고 있었다. 상황 그 자체를 온전히 즐기는 그의 모습에 나 역시 자연스레 화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행작가, 태원준. 자막을 통해 알게 된 그의 이름과 직업이다. '여행작가'라는 수식어가 어쩌면 저리도 잘 어울릴까 싶었다. 그에게는 이 일이 천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서글서글한 성격, 적재적소에 장난기를 발휘하는 부드러운 힘, 그리고 타인을 대하는 겸손하고 다정한 태도까지. 낯선 곳에서 만난 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가 소통하는 방식이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매 순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감탄을 쏟아내는 모습 또한 무척 인상적이었다.
방송이 끝난 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2001년부터 꾸준히 여행을 다녀온 나라가 무려 100개국이 넘는 베테랑 작가였다. 당시 기준으로 일 년 전인 2013년에는 두 권의 여행 여행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와 『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
제목을 보며 유독 눈에 들어온 단어가 있었다. 바로 ‘엄마’였다. 군대를 다녀온 성인 남성들이 대개 ‘어머니’라는 호칭을 쓰는 것과 달리, 그는 정겨운 느낌 그대로 ‘엄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심리적 성장과 함께 격식을 갖춘 표현보다는 편안하고 따뜻한 진심을 전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나온 선택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보았다. 엄마와 아들이 함께 떠난 여행 이야기가 궁금해져 나는 곧장 두 권의 책을 주문했다.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완전히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TV 속 찰나의 순간에 느꼈던 매력이 책 사이사이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따뜻함과 진정성이 느껴지는 문장들에 깊이 매료되었다. 여행의 기록을 혼자만의 추억으로 간직하지 않고 책을 통해 기꺼이 나누어 준 그에게 고마웠고, 그 다정한 기록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학교 사서 선생님이 보내신 메시지에 도서관 프로그램 일정이 담겨 있었다. 강사 명단을 확인하던 내 눈이 번쩍 뜨였다. 태원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서 작가님을 직접 만날 수 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기화가 찾아오다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다른 일정으로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특강 당일, 교실에 들어가 조례를 하며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오늘 도서관에서 특강 있는 날이지? 선생님이 정말 좋아하는 작가님이 오시거든. 선생님은 직접 듣지 못해서 너무 아쉬우니까, 너희가 대신 열심히 경청하고 와 줘. 좋은 말씀 있으면 메모하는 것도 잊지 말고!"
나는 평소 특강이 있는 날이면 아이들에게 항상 노트와 펜을 준비하게 했다. 휴대폰에 메모하면 안 되냐고 묻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강연자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면 정성껏 필기하는 모습이 더 보기 좋을 것이라 일러두었다.
강연이 끝난 시간, 우리 반 남학생 몇 명이 우르르 교무실로 들어왔다. 떠들썩하게 들어선 아이들 중 한 명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선생님! 작가님한테 사인받았어요!"
"그래? 정말 좋았겠다!"
부러운 마음을 꾹 누르며 건네받은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 님께. 태원준 드림. ]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며 아이들이 덧붙였다.
"선생님이 못 오셔서 너무 아쉬워하시는 것 같길래, 저희가 대신 사인받아 왔어요."
밀려오는 감동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 선생님 주려고 받은 거야? 얘들아, 너무 감동이다. 고마워!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어?"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들의 행동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속 깊은 마음이었다. 이런 예쁜 감수성을 품고 자라는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특별한 메시지가 적힌 건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필체를 소장하게 된 것만으로도 내겐 더없이 큰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은 건, 누군가의 '좋아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대신 전해 주려 했던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그날의 뭉클함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잔물결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