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좋았던 하루

by 눙디

봄기운이 고개를 내민다지만, 스치는 바람 끝에는 여전히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던 3월의 주말 아침이었다. 특별한 계획 없는 휴일,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나니 문득 마음 한구석이 일렁였다. 갓 내린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었지만, 그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눈에 담고 싶다는 갈증이 일어났다. 그 찰나의 이끌림을 나는 차마 흘려보내지 못했다.

"어디라도 다녀올까?"
목적지도 없이 툭 던진 제안에 나조차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났다. 가족들은 바람이 차다며 집에서 쉬는 게 좋겠다고 입을 모았지만,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내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결국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 내게 엄마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디 가려고?"
"글쎄, 우선 고속도로부터 타보려고."
"휴게소라도 가려고?"
엄마의 농담 섞인 물음에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응, 휴게소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올게."

작은 가방에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무작정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지도를 켜보았지만 딱히 마음이 향하는 곳은 없었다. 자동차 바퀴를 움직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차 안에서 보냈다. 그러다 문득, 멀리 가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평소 궁금했던 독립서점들이 떠올랐다. 늘 다니던 곳이 아닌, 지도에 저장해 두었던 다른 도시의 서점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목적지인 책방은 무인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손님 없는 책방에는 정갈하게 분류된 책들과 커피머신이 나를 반겼다. 아늑하고 세심하게 관리된 공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히터가 꺼진 실내는 바깥공기만큼이나 서늘했다.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이내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날이 풀리면 꼭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독서 시간을 누려보리라 다짐했다.


아쉽게도 다음으로 찾아간 서점은 이미 폐업했거나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헛걸음의 연속이었지만 이상하게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주택가의 작은 서점. 주차 공간을 찾느라 동네를 세 바퀴나 돌고 나서야 겨우 들어선 그곳은, 조금 어둑한 조명 아래 책들이 자유롭게 몸을 뉘고 있었다. 책들보다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곳곳에 붙은 주인의 손글씨였다. 문장마다 묻어나는 확고한 철학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마음에 들어온 여행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새로 산 책의 첫 장을 넘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때쯤, 햇살이 잘 드는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아이스 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데, 코끝을 찌르는 달콤한 향기가 먼저 반응했고, 이내 쉼 없이 들려오는 배달 주문 소리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사장님은 혼자 분주히 와플을 구워내고 계셨다. '여기가 와플 맛집이구나!' 그 유혹적인 냄새를 이겨낼 재간이 없어 결국 '애플 시나몬 와플'을 추가로 주문했다. 수제 애플잼의 달콤함과 은은한 시나몬 향이 라떼와 기막히게 어우러졌다. 고칼로리라 반만 먹으려던 다짐은 무색하게 사라졌고, 야무지게 접시를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책 속 여행자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문득 집에서 쉬고 있을 엄마와 동생에게도 이 달콤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 와플을 추가로 포장했다. 돌아오는 차 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속도로를 달려 멀리 떠날 것처럼 호기롭게 나섰는데, 결국 집 근처 카페에서 와플을 먹으며 시간을 보낸 상황이 우스우면서도 즐거웠다.


그래도 가보고 싶었던 책방 여러 곳을 다녀올 수 있어 좋았다. 폐업한 곳도 있었고, 문을 닫은 곳도 있었지만 철학이 담긴 책방을 둘러보는 시간은 충분히 즐거웠다.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서 먹은 맛있는 와플과 라떼, 그리고 여행자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참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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