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낙원
새벽까지 거센 바람이 불고, 비는 장맛비처럼 꽤 오랜 시간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자, 창밖 날씨가 눈에 들어왔다. 맑음이었다.
방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지상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
초록빛 잔디가 펼쳐진 마당, 저 멀리 겹겹이 이어진 산, 낮게 내려앉은 뭉게구름과 따스한 햇살.
그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어제의 고생은 충분히 겪을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했고, 이 숙소를 선택하길 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테라스에 놓인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이 지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고요하게.
'힐링'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조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식당'이라 부르기엔 조금 어색한 공간이었다.
리셉션 옆에 몇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음식이 준비되면 그 자리가 곧 식당이 되는 식이었다.
어제 숙소에 체크인할 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얼굴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고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그러다 아침이 되어서야 주인 부부의 얼굴을 확인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젊은 부부는 말과 행동 모두에서 친절함과 배려, 그리고 정성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따뜻한 분들이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주변에 놓인 소품들을 바라보며 주인 부부의 아기자기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평소에 아기자기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런 소품들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때 남자 주인이 선셋 투어를 소개해주었고, 장소가 '빠이 캐니언'이라는 말에 마음이 끌려 바로 신청했다.
빠이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가 있다면, 단연 '빠이 캐니언'이 아닐까 싶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협곡인 데다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이라 불릴 만큼 웅장한 풍경을 자랑한다고 하니, 예전부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먹을 것이 풍부하진 않았지만, 차려진 음식에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당, 식이섬유까지 고루 갖춰져 있어 백 점짜리 식단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새들의 지저귐은 배경음이 되어 주었다.
마당 한쪽에는 두 대의 오토바이가 나란히 놓여있는데, 옆방 커플이 타고 다니는 것이다.
빠이에선 이렇게 스쿠터나 오토바이를 렌트해 주변 마을을 한 바퀴씩 도는 여행자들이 많다.
뚜벅이인 나로서는, 그런 모습이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11시가 조금 넘어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진흙길은 햇볕 덕분에 군데군데 마른 곳이 생겨 걷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대나무 다리에 다다르자 심장이 두 군 거리기 시작했다.
'하, 저 다리를 어떻게 건너지?'
어제 내린 많은 비로 물은 제법 불어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건너야만 했기에,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뎠다.
반대편에서 두 사람이 건너오던 순간, 우리는 다리의 한가운데서 마주쳤고 나는 대나무 난간을 더 꽉 움켜쥐었다. 다행히, 대나무 다리는 셋의 무게를 견뎌주었다.
11시가 약간 지난 시간이었지만,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어서인지 도로는 한산했고, 사람들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동네의 골목길을 천천히 거닐며, 풍경을 눈과 사진 속에 담고 싶었다.
아기자기한 주택 마당의 소소한 풍경이 눈에 들어와 찰칵!
담벼락에 활짝 핀 꽃이 생기로 가득 차 있어 또 한 장 찰칵!
벽화 속 할머니의 웃는 얼굴에서는 여유와 따뜻함이 묻어 나와 또 셔터를 눌렀다. 찰칵!
오픈한 상점이 많지 않던 시간이었는데, 마침 문을 연 마사지샵이 보여 더위도 피할 겸 안으로 들어갔다.
빨래를 널고 계시던 사장님은 잠시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마사지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내 발의 피로를 풀어주셨다.
태국 여행 초반에는 늘 전신 마사지를 받았는데, 이제는 받더라도 주로 발 마사지 정도만 받게 된다.
전신 마사지를 받으려면 옷을 갈아입는 번거로움이 따르고, 가끔은 청결하지 못한 환경에서 마사지를 받은 후 찝찝한 기분이 남는 경우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발 마사지만은 받는 이유는, 특히 많이 걸은 날엔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피로가 어느 정도 해소되기 때문이다.
1시가 넘으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마침 눈에 띈 식당 하나가 있어 들어섰다.
태국에서는 간혹 메뉴를 칠판에 적어 바깥에 세워두는 식당을 자주 보게 되는데, 색색의 분필로 꼬불꼬불, 동글동글 귀엽게 적힌 글씨를 볼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밖에 놓인 테이블이라 무척 더웠지만, '이열치열'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밥 한 그릇을 시켜 야무지게,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 도대체 계란을 몇 개나 먹은 건지! 콜레스테롤이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내일부터는 많이 먹지 않도록 해야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워킹스트리트에 놓인 카페에서 생각차 한 잔을 샀다.
한국에서도 티를 주문할 때 늘 아이스로 마시는 습관이 있어, 이번에도 무심코 차갑게 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따뜻한 차만 된다고 했다.
또다시 '이열치열'이란 생각에 그렇게 한 잔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 카페는 해가 떠 있을 때와 해가 진 후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저녁이 되면 사람들도 많아지고, 악기 연주에 노랫소리까지 흘러나오며 왁자지껄해진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저 오며 가며 눈으로만 담아본다.
숙소에 도착해 선셋 투어 차량의 픽업을 기다리며, 뜨거운 진저티를 마셨다.
빠이 캐니언에서의 선셋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