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의 히피 마을 '빠이(Pai)'_5

동네산책

by 눙디

어제의 아침과 닮은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변한 건 구름의 모양뿐인 것 같다.


이 숙소를 예약할 때 에어컨과 TV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주변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어 주저 없이 예약했다.

고산지대에 위치한 덕분에 선풍기 하나로도 충분했고, TV는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간단히 볼 수 있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 이곳에선 조용함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평소에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지만,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테라스에 앉아 있는 시간만큼은 음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라디오 음악방송을 틀었다.

부모님이 자주 듣던 주파수였고, 듣다 보니 내게도 익숙해졌다.

낯설지 않은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이 고요한 아침과 잘 어울렸다.

잠시 그렇게 힐링 타임을 갖고, 식사를 하러 갔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어제와는 조금 달랐다.

샐러드볼 하나에도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주 좋은 아침 식사였다.


식사 후 잠시 쉬고, 가볍게 채비를 마친 뒤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길로, 동네의 또 다른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어제는 그냥 지나쳤을 법한 자리에 핀 꽃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꽃은 언제 봐도 참 예쁘다.

요즘 우리나라 기온도 점점 올라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런 더운 나라의 꽃들도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다시 마주한 대나무 다리.

몇 번이나 지나다녔더니 이제는 제법 동네 사람처럼 익숙하게 걷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아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래도, 난간은 꼭 붙잡는 걸 잊지 않았다.


빠이 워킹스트리트에는 제법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고, 도착하던 날 비가 내려 사진 찍지 못했던 빠이 터미널의 모습도 담아봤다.

또 다른 여행지를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책방 앞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는 한눈에 봐도 특별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인데, 마치 낡은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듯한 모양이었다.
책의 옆면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진짜 책더미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오래된 책상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

이 작은 조형물 하나에도 빠이라는 동네의 감성이 묻어났다.


식당 벽면 한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밝고 귀여운 느낌이면서도 어딘가 엉뚱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그림이었지만, 따뜻한 색감 덕분에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벽에 적힌 'PAI is falling in LOVE'라는 문구를 읽는 순간, 빠이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끌어당기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카페에 들러 코코넛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더위를 식혔다.
아메리카노인데, 물 대신 코코넛 워터를 사용하고 과육도 함께 넣어주어 깊은 맛은 느낄 수 있었다.

태국에서 카페에 갈 때마다 코코넛 커피가 있는지부터 먼저 살펴보게 된다.
시판용 코코넛 음료수를 사용하는 카페도 있지만, 대부분은 코코넛 열매 속 워터를 사용하는 듯했다.


과일 상점을 지나며 각기 다른 열대과일들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붉은색의 용과와 망고, 털이 복슬복슬한 람부탄, 그리고 잘 익은 파인애플과 코코넛이 시장의 활기를 더해주었다.


시장 구경을 하며 가장 눈에 띄고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것은 작물 씨앗이었다.

태국 채소들은 크기가 작고 앙증맞은 편인데, 품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구입해 보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반입 금지 품목으로 지정되어 있어 아쉬움만 남는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상인들은 허둥지둥 천막을 내리느라 분주했고, 수레 위의 강아지들도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며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수레 위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수레 뒤편 오토바이 위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는 빗속에 그대로 젖은 채 있어야만 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도 빗줄기 속에 발걸음을 멈추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좋지만, 너무 오래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비가 그친 뒤에는 더위가 한풀 꺾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쓰임을 다한 철재들을 창의적으로 재활용해 멋진 의자와 조형물로 다시 태어난 모습이 눈에 띄었다.

특히, 첫 번째 사진 속 의자를 보며 태국 사람들의 뛰어난 손재주와 독창성을 볼 수 있었다.

버려질 뻔한 재료가 그들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얻는 순간, 그들의 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실용성과 예술적 감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 근처에 눈에 띈 식당으로 들어갔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았고, 내 자리 뒤편으로는 이미 손님들이 꽤 앉아 있어 맛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인애플 볶음밥과 모닝글로리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맛도 좋고 양도 푸짐해서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남길 수밖에 없었다.

거의 식사를 마쳐갈 무렵, 식당 여사장님이 다가오셔서 맛은 어땠는지 물으셨다.

문득 식당 간판이 떠올랐는데, 거기에 그려진 인물은 아무래도 사장님 본인이 아닐까 싶었다.


빵집에서 빵 두 개를 고르고, 편의점에서는 과자와 사탕, 밴드, 그리고 헤어에센스를 샀다.
문방구에 들러서는 얇은 노트 한 권도 샀다.


사진 속에 있는 밴드는 내가 태국에 올 때마다 꼭 사는 품목이다.

방수밴드는 아니지만, 물에 닿아도 금세 마르는 편이라 그 점이 마음에 들어 꾸준히 사용하고 있다.


헤어에센스는 특별히 좋은 제품이라기보다는, 작고 가벼워서 여행용으로 딱 좋다.

어느새 여행할 때마다 챙기게 되는 필수템이 되었다.


노트는 얇고 가벼워 휴대하기 편해 마음에 들었다.
노트북은 짐이 되어 가져올 수 없고, 휴대폰에 글을 쓰자니 불편함이 따른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바로 적고 싶지만, 손글씨보다 타이핑이 느린 건지 생각을 미처 다 쓰기도 전에 잊어버리는 일이 잦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날로그가 더 잘 맞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땡모반(수박주스)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노트를 펴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하나둘 적어가며 휴식을 취한다.


저녁 시간, 잠시 워킹스트리트에 나가 팟타이와 꼬치를 사 와 숙소에서 먹었다.

팟타이를 만들어주시던 사장님은 무척 즐겁고 신나 보였다.

요리하는 내내 경쾌한 몸짓으로 재료를 볶아내시는데, 마치 작은 퍼포먼스를 보는 듯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작은 상자에 다양한 고명을 올려주셨는데, 하나하나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함께 사온 꼬치도 달콤한 양념에 은은한 숯불향이 더해져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빠이에서의 마지막 밤이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빠이를 떠나는 날, 세 번째 아침을 맞이했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하늘은 흐릿했지만, 서서히 비구름이 물러가며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자리에 앉아 간단히 조식을 먹었다.

다시 762개의 커브길을 지나야 하기에, 가볍게 먹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자리만 달라졌을 뿐인데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여전히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터미널까지는 숙소에 픽업 차량을 부탁해 편하게 이동했다.

또다시 대나무다리 위에서 캐리어를 들고 건너고 싶지 않아, 전날 밤 미리 차량을 신청해 두었던 덕분이다.

그렇게 무리 없이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후, 문득 옆 의자에 앉아 계신 한 할아버지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나는 한참을 그분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아도 80세는 훌쩍 넘었을 듯한 분이셨는데,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안경 너머로 책을 읽고 계셨다.

그 모습이 너무도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존경심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른 체격에 커다란 가방 두 개를 곁에 둔 모습은, 그분 역시 여행 중인 사람이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낡아진 책을 보아하니 여러 번 읽었을 듯한 책이었고, 아마 그 익숙한 내용을 또 한 번 되새기고 계신 것 같았다.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동네 고양이 한 마리가 할아버지 옆 의자에 올라가 앉자, 할아버지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는데 그 손길에서 묻어나던 따뜻함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내가 먼저 터미널을 떠나게 되어 버스에 짐을 싣고, 편의점에서 음료수 한 병을 사 와 조심스레 건넸다.

멋진 할아버지를 통해 많은 것을 느낀 감사함이었다.

그렇게, 나는 빠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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