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지옥이었다.

사계절은 없었다.

by 눙디

5년 차까지는 주로 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그리고 6년 차가 되는 해에는 중학교에서 1년간 근무했다.

처음 가르치는 어린 학생들이라 기대를 안고 3월을 맞이했고, 3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학생들 모두가 반짝이는 보석처럼 예뻤다.

크게 말썽을 부리는 학생도, 모난 성격의 학생도 보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해를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우리 반 아이들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해에는 유독 새 학교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중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아주 행운이라 생각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중학교에서 근무해 본 적이 없어 망설였지만, 다른 학교와의 인연이 닿지 않아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중학교는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였으며, 젊은 교사들이 주로 많았고, 경력 있는 교사들이 많지 않았다.


여럿이 모이는 교사들 사이에선, 언제나 교감선생님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유별난 교감선생님 험담을 듣기도 했지만, 나와 무관한 일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난 무심하리만큼 나와 관련이 없는 일에는 관심이 두지 않는 편이었고, 내게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최고보다는 최선을'은 고등학교 2학년 우리 반의 급훈이었다.

그때는 그 급훈이 내 인생의 모토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일 년에 몇 번은 그 문장을 사용했고, 종종 우리 반 급훈으로도 삼았다.


새 학기 준비 기간에 교감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교직원회의 시간에 사용할 학교 소개용 프레젠테이션 작성을 부탁하셨다.

기본 자료를 주셨고, 나를 믿고 맡겨주신 것만큼 잘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열심히 만들어서 완성된 파일을 드렸을 때, 애니메이션 기능을 넣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이 왔다.

나는 좀 더 수정을 거쳐 부장님에게도 한 번 보여드린 후 최종파일을 보내드렸다.

교감선생님은 내가 드린 파일을 받고도 수고했다는 말 대신 마음에 들지 않는 내색을 보이셨다.

그리고, 나는 그 일로 제대로 찍힌 사람이 되었다.


수업을 하고 있을 땐, 교실 밖 창문 너머로 내 수업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고 가셨고, 종례 이후에 진행되는 청소시간에도 지켜보는 가운데 청소를 해야 했었다.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반추해 봤을 때 그분의 스타일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렇기엔 너무 과한 부분이라 느껴졌다.

그럼에도 참 다행인 것은 수업과, 청소지도에 관해 한마디의 말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눈에 빈틈이 보이고 듣기 싫은 소리를 듣게 되면 자괴감에 빠지는 강박이 있다.

특히 학교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더욱 단련해 온 것 같다.

계약직 교사이기때문에 그런 생활을 이어 왔다면 나는 훨씬 더 힘들고 불행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원래 성향 자체가 스스로를 다잡으며 버티는 편이었다.


그런 성향은 학급 운영에도 드러났다.

예를 들어, 학급 출결이 현저히 낮아서는 안 되었고, 우리 반 학생이 문제를 일으켜 화제가 되는 일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항상 내 마음같이 되는 건 아니었다.


중간고사 시험문제 출제기간, 내가 출제한 시험문제를 검토한 후에는 '시험문제 내 보지 않았냐', '수능출제문제를 보거나 시중에 나와 있는 문제집을 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시험문제에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은 감사했지만, 이제 막 교사가 된 20대 선생님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부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내 부족함을 그렇게 노출시킨 채 공개하듯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무기력해졌다.


어느 날, 나는 ○○교사에게 방과 후에 별실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해당 날짜에 사용을 할 수 있도록 열쇠를 미리 받아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해당일이 되어 종례 후 열쇠를 받으러 간 내게 ○○교사는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며, 다른 일이 있어서 빌려줄 수 없다는 말을 내게 하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어떻게 약속을 잊을 수가 있는지 바로 잡고 싶었다.

요목조목 부탁 내용을 복기하며 대화하던 중, 서로 격앙된 목소리와 상기된 얼굴이 드러났다.


다음날, 부장님은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어제의 일을 물으시곤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교사가 교감선생님하고 친분이 있잖아요. 어제 일을 교감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교감선생님이 선생님을 내년에 다른 학교 가지 못하게 한다고 했어요."

교감선생님이 내 부서를 찾아와 부장님에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굳이 나에게 전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수업에 들어간 나는 숨이 막히고 과호흡이 이어졌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신을 했다.

눈을 떴을 때에는 보건실이었고, 그때부터 나는 아주 오랫동안 서럽게 울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욱 빈틈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다.

출근시간보다 한참을 일찍 출근하여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교무실에 와서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청소를 했다.

그리고 커피를 많이 내려놓았다.

씩씩하게 수업을 했고, 학생들을 지도했다.

학생들에게 집중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었고, 그렇게라도 해야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엔, 나에게 불만을 보이던 남학생이 수업시간에 내 앞에서 교실 바닥에 침을 뱉고 나를 향해 욕을 했다.

남학생의 담임과 이야기를 나눈 뒤 난 교권위원회를 열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사건경위서를 한참 작성하던 무렵, 교감선생님은 나에게 차를 한잔 하자고 메시지를 보내셨다.

남학생 관련 일로 나를 부른 거라고 생각을 했고, 내가 드릴 말씀을 머릿속에 정리해서 찾아뵈었다.


낯설고, 어색한 웃음을 띠시며, 나에게 처음으로 다정한 말투를 쓰시면서 차를 한잔 주셨다.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남학생 엄마로부터 많이 반성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는 건 어떠냐는 회유의 말이었다.

나는 생각해보지 않고 교감선생님의 뜻이 그러하시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내가 교감선생님의 회유를 받아들인 건, 설득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교사를 보호해 주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학부모회에 활동하는 어머님의 아이를 감싸려는 태도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부분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는 계기를 만들고, 반성하는 태도 보였을 때 다독여가면서 또는 징계 이후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학생이 어긋나가지 않도록 지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사과 한마디 징계 하나 없이 그날의 일은 하나의 해프닝이 되어 시간 속에 묻혔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에도 그 남학생 한 명으로 인해 그 반의 수업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출근하던 추운 겨울, 나는 교감선생님께 드릴 선물과 함께 메시지를 써서 드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함이 아니었다.

전혀 아름답지 않았던 나의 일 년에서 해방되는 날을 기념하는 의미로 그것으로 인연의 종지부를 찍는 마음으로 드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학교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중학교에서 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계약직 교사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적어도 다시 그곳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내게 있으니 말이다.

십 년도 더 지난 그 해 일 년은 아직도 나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혀 있다.

나는 아직도 지역명을 딴 학교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


지옥이 있다면 그 해 일 년이 지옥이었다.

한 해가 끔찍했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 매일같이 학교 가기 싫은 마음을 부여잡았던 일 년이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해의 모든 일을 이렇게 토해내듯 써내려간 것은, 이제 내 상처를 조금 내려놓기 위해서다.

잘 버텼노라고, 날 위로하는 내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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