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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공개 Jun 15. 2024

짜디 짠 데이트

돈에 미쳐서 결혼하는 우리

우리는 항상 ‘어떻게 해야 돈을 덜 쓰고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만났더니, 어린 시절에 대강 해볼 거 다 해봐서 굳이 또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달까. 데이트 코스는 다 비슷비슷하단 걸 알기에. 밥 먹고, 카페 가고, 영화 보고, 놀러 가고, 구경하고, 선물하고... 흔한 돈 버는 어른들의 돈 쓰는 코스. 게다가 둘 다 투자에 관심이 있는지라 돈을 소비하는 것이 아까웠다.


그의 첫 생일날이었다. 생일 축하파티를 얼마나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남자친구가 먼저 '생일 때는 돈 많이 쓰지 말자'라고 말을 건넸다. 자기는 조각케이크 하나면 충분하다고. 이런 초미니 생일상을 준비해 본 것 자체가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한번 해보고 나니 굉장히 뿌듯하달까. 돈을 써야 한다는 부담도 덜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퀘스트를 깬 기분이기도 했다. 단돈 16,000원짜리 소박하지만 완벽했던 그의 생일상이었다.     


연애 초기에는 둘 다 크게 책을 읽는 데에 관심이 없었기에 대부분 근처 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화 주제는 똑같다. 콘텐츠는 주로 돈, 경제, 투자, 인생, 삶, 그리고 결혼. 이러한 이야기만 나누다 보니 서로의 가치관을 금세 파악하고 진도도 빨리 나갔던 것 같다. 물론, 결혼을 준비하는 지금도 내나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눴냐면,     


앞으로 돈을 어떻게 모아야 할까? 투자는 어떤 전략으로 해야 가장 유리할까? 우리가 투자한 회사는 잘 굴러가고 있나? 요즘 경제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상위 자산권에 진입하기 위해선 우린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상위 자산권에 진입한다면 무엇이 가장 위태로울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어떤 삶을 살고 싶어?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물려주고 싶어?... 등등이 있다. 요즘은 ARK INVEST 보고서를 함께 읽어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역시나 가장 저렴한 데이트는 독서. 대화하는 것이 지치면 카페에 책 한 권씩 들고 가서 읽고 오기도 했다. 워런 버핏의 취미가 독서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워런 버핏은 매일 5시간 이상 5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읽었다는데, 물론 우리에겐 그 정도로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있진 않았지만, 평범한 커플들에 비해 참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돈의 속성, 돈의 심리학, 레버리지, 불변의 법칙 등 그와 나는 자기계발과 돈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가 나에게 책 몇 권을 추천하면, 나는 그것을 겨우겨우 읽으며 경제 상식을 소화시키는 그 흔적은 우리 집 책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모르는 것을 질문하고 서로 공부하다가도, 다이소에 놀러 가서 '어디 시간 때울 거 없나'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마냥 게임 코너를 둘러보기도 했다. 물론 그중에 당첨된 것은 '부자 만들기 게임'이었다.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이 게임은 품질이 조악하지만 현실감 넘쳐서 웃음이 난다, 부루마블은 한 바퀴 돌면 보너스를 받듯이 월급을 받고, 황금카드에서 강재로 건물을 매각하듯이 갑자기 등록금을 내야 할 때도 있다. 투자에 관심이 있는 커플이라면 한 번쯤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생각지도 못한 지출과 자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미리 체험할 수 있고, 각 플레이어의 투자 성향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저축을 하면서도 공격적으로 부동산 매수를 했지만, 반면 그는 미친 듯이 주식과 온갖 자산을 매수했다. 게임의 승패는 자존심 상하니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가끔 돈 이야기가 지겨울 때면, 스타필드나 이케아 구경을 갔다. 단, 이케아에 놀러 올 때 중요한 것은 1. 끼니는 먹은 뒤에 출발하고, 2. 어떠한 물건도 구매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다. 시간은 무한대로 쓸 수 있고, 비용은 왕복 버스비 6,000원 정도 사용하게 된다. 가끔 다리가 진짜 너무 아파서 쉬기 위해 카페를 향하긴 하지만.     


물론 이케아에 가서도 돈 얘기로 재잘댔다. ‘우리, 부자 되면 이렇게 방 꾸미자!’ 하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이거 다 합하면 예산 얼마야?’라며 눈에 불을 키다가도, ‘우리가 부자가 되면 이케아에 오긴 할까?’라며 대화를 마무리짓곤 했다.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로 끊임없이 돈 이야기를 하는 그가 신기하다.

      

요즘은 집 근처 둘레길 산책에 꽂혀있다. 2시간 코스, 약간의 등산이 어우러져 운동도 함께 할 수 있는 루틴이다. 적당한 때가 오면 그가 먼저 나에게 ‘둘레길을 갈 때가 왔노라’ 알렸다. 부스스한 머리로 눈꼽 겨우 뗀 채 모자를 눌러쓰고 하드코어 산책길에 나선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팔토시와 마스크로 무장을 하고, 그는 기계처럼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쥐고, 산에 오르며 또다시 돈 이야기를 하고, 돈 영상을 듣는다. 어쩌면 나는 몇몇의 유튜버와 함께 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의 카톡방은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담긴 영상, 경제 현황 요약본, 투자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로만 가득 찼다. 그는 원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돈 이야기를 화수분처럼 뿜어댔고, 나는 원 없이 듣고 싶은 돈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듣고 생각을 나누었다. 어딜 많이 놀러 다니지 않고 그저 이야기를 나누거나 정보를 공유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이다. 로맨스 따위 없는 빡빡한 노잼 커플이라 놀린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이것이 우리만의 애정표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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