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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크롬 May 06. 2020

근대 정치사상 톺아보기

이언 샤피로 <정치의 도덕적 기초> 리뷰


  1. 정부의 정당성은 어디에 기원하는가?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기반은 무엇인가? 시사에 관심이 많다면 그닥 낯설지 않은 질문들이겠지만, 막상 진지하게 바라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우리는 정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줄 의무가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지만 그 방법과 목적에 있어 저마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도 안다. 위대한 정치사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점심시간에 비유해보자. 어떤 이들은 식사계의 국밥처럼 '근본' 원칙을 찾으려 하기도 했고(계몽주의, 사회계약론), 누군가는 지금 체제에서 더 나아질 수 없다며 그냥 학식에서 해결하자고 했다(반계몽주의). 한편 다른 이들은 모두가 불만이 없는 이상적인 식당을 찾게 될 거라고 주장했고(마르크스주의), 누구는 개인 권리를 옹호하며 메뉴를 다수결로 정하자고 했다(민주주의). 이언 샤피로의 <정치의 도덕적 기초>는 이처럼 근대 정치사상의 조류를 이끈 몇 가지 아이디어에 관한 이야기다.






  2. 계몽주의는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을 동원해 진보를 이룩하고자 한다. 자연법이 허락하는 한에서 신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존 로크의 '제작자적 이상'이 이를 대표한다. 특이하게도 확실성을 추구하는 과학과 개인 권리를 중시하는 계몽주의의 속성은 결정론과 권리 추구 사이에서 역설을 만들어 낸다. 완벽한 정답이 있다면, 사람들이 무언가를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고전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제레미 벤담은 자연법을 비판하고 법실증주의를 내세우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극대화'를 표방했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은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여 사회 전체의 공리를 최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만으로는 강자의 착취와 같은 문제들을 막지 못하므로 정부는 자멸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이기적 행동을 제어하고, 공리를 증진할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야만 한다. 고전 공리주의 기획의 문제점은 누가 공리를 경험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버트 노직의 쾌락 기계의 경우처럼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만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또한 공리의 객관적 비교가 가능하다는 원리와 정치경제학의 한계효용법칙이 더해지면 아주 급진적인 재분배 논리가 탄생하는데, 이는 평등에 관한 근본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귀족의 재산을 뺏어 평민에게 주어야 하는가?).






  3. 공리 측정의 어려움은 물론 사람들 사이의 도덕적 경계선에 무감각한 고전 공리주의를 뒤로하고, 경제학자 파레토는 신박한 이론을 내세운다. 그는 합리성의 최소 조건인 선호도에 관한 이행성(A보다 B를 좋아하고 B보다 C를 좋아하면, A보다 C를 좋아한다), 공리 극대화 원칙, 그리고 무차별 곡선만으로 사람들의 선택에 관한 모델을 만들어냈다. 자유 시장에서 사람들은 더 높은 공리를 찾아 '파레토-우월'한 변화를 지향하며, 이는 '파레토-최적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 반면 (두 명의 거래를 가정했을 때) 하나가 손해를 보는 '파레토-결정불가능'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재분배가 이러한 움직임에 해당된다. 하지만 파레토는 재분배에 대해 규범적 주장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파레토의 모델을 고전 공리주의와 결합시키면 재미있는 그림이 탄생한다. 가령 파레토-우월한 것은 벤담-우월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벤담-우월의 경우 누군가 손해를 보아도 전체 공리의 합만 유지되거나 상승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분배에 있어 벤담의 '객관적' 원칙은 너무 강하고, 파레토의 '주관적' 원칙은 너무 약하다. 이번엔 자유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또다른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한에서만 국가가 간섭할 수 있다는 '위해 원칙'을 제시한다. 그에게 자유는 최고의 가치다. 따라서 남들에게 위해를 끼칠 경우에 정부가 공리주의의 원칙을 꺼내드는 것이다. 위해에 대한 밀의 해석은 결과주의적이기도 하고 의도주의적이기도 하다. 전자는 정부의 개입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후자는 자유지상주의적 입장으로 귀결되며 착취에 대해 무력하다는 단점이 있다.






  4. 거대한 예언자적 기획의 성격을 띠는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에 초점을 두고 세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벤담과 마찬가지로 인체의 근원적 이해관계(내생적)와 헤겔의 변증법 이론 토대로 삼은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양식의 내적 긴장으로부터 반작용이 일어나 결국 안정된 체제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는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결정론적 선택이 된다. 한편 사회적 조건에 의해 개인 의식이 규정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분업 철폐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개인 권리에 있어 또다른 시사점을 가진다. 이번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간략히 살펴보자. 이는 오직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전제를 가진다. 따라서 불변자본인 기계가 보급되고 이윤의 원천인 가변자본(노동력)이 줄어들면 이율이 낮아진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붕괴된다. 하지만 기술혁신으로 이율은 유지될 수 있고 새로운 생산 분야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유동성과 독점 문제도 정부 정책으로 해결된다. 이 말고도 노동력이 아닌 재화들도 가치를 산출할 수 있으며 노동은 비생산적 소비와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제작자적 이상과 더불어 노동으로서 발생하는 자기 소유권 개념을 당연시한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배우자 또한 노동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종합하여 이 또한 '착취'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5. 공리주의가 기대에 못 미치자 사회계약론이 고개를 내밀었다. 침묵의 주관적 공리주의 vs 착취의 객관적 공리주의 구도 사이에서 존 롤스의 이론이 등장한다.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으로 설명되는 그의 논증은 사람들에게 인종, 성별, 지능과 같은 사실 등이 결정되지 않은 채 어떤 통치 원칙을 선택할지 상상하기를 요구한다(더불어 사회에 관한 일반적 사실과 경제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즉 게임의 규칙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 여부를 알기 전 규칙에 동의할 것을 요청받는 것과 유사하다. 롤스는 자연법 운운하는 정치심리학과 복잡한 논리를 통해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을 배제('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정치적인 직관')하고 중첩적 합의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했다. 위 장치에서 각 개인들은 좋음과 가치에 대해 남들에게 정당화할 필요가 없고 그저 선택만 하면 된다. 여기서 특이한 부분은 롤스가 유전자나 환경의 운으로 얻은 인간의 능력이 다른 물리적 자원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가치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자기 소유권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긴 제작자적 이상에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롤스는 나아가 의무론적 차원의 '최소 극대화 원칙(차등 원칙)'을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좋은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면, 무지의 조건 하에서 가장 불리한 사람의 입장을 최대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식 재분배는 여기서 유래한다. 단, 불평등이 커지는 변화도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팔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세상에 맹인과 정상인 단 두 명이 있다면 정상인의 눈을 하나 뽑아 맹인에게 주어야 하는가? 잘생김에 세금을 물려야 하는가?






  6. 이 모든 기획이 다 부질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에드먼드 버크를 비롯한 반계몽주의자들이다. 버크는 인간 이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세상을 개조하고 이해하려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바람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프래그머티즘 사상가 리처드 로티는 문제에 이론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고 진리 추구를 사회적 합의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철학은 해석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다소 온건한 자유주의 사상가 존 듀이는 토대론적 물음은 선택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반계몽주의를 초기 계몽주의에 대한 과잉 반응으로 평가한다. 반토대론적 견해를 위한 "토대를 닦"는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과학이 어느 정도 확률적 일반화를 통해 학문적 기반을 닦을 수 있기에 인공적 산물인 사회에 대한 분석이 무용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편 마이클 샌델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는 자발적 연합에 내포된 선택의 함의가 현실과 어긋난다고 말한다. 소속 집단에 대한 의무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권리와 의무가 어떻게 경험되는지 고려하지 않고 권리와 의무를 논한다는 건 부자연스럽다. 우리의 목표와 기준은 타인에게 영향을 받으며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정의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는 전체론적이다. 그들에게 무지의 베일 아래의 개인은 집단과 철저히 분리되어 '뿌리뽑힌' 존재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는 수많은 갈등과 경쟁하는 주장 속에서 명료한 절차를 내놓지 못하고, 전통적 관습을 강조하기에 내적 억압 체제를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다.






  7. 저자는 최종적으로 성숙한 계몽주의로서의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민주주의도 많은 결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가장 잠재력이 높은 정치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올바르게 해석하고 제도화된다면, 진리가 승리하고, 인권이 존중받고, 전통과 문화가 보전될 가능성이 가장 큰 체제는 민주주의다. 이는 진리 중심의 플라톤의 엘리트적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민주주의는 부패와 부정직을 폭로하는 메커니즘을 토대로 건전한 사상 경쟁을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 태도와 상호보완 관계를 맺고 무지의 한계선을 밀쳐내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에는 토크빌과 밀이 지적한 다수(혹은 소수)의 횡포, 투표의 순환성, 그리고 과도한 권력 경쟁 등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현 상태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영구적으로 존재하며 자정작용이 가능한 체이다. 개인 권리와 자유는 민주주의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잘 보장받는다.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과제는 자본의 영향을 줄여 실제 논쟁을 규율된 토론에 가깝도록 방법을 찾는 것이다.






  8.  <정치의 도덕적 기초>는 '기초'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이 무색하게 굉장히 읽기 까다롭다(물론 내가 항상 그런 책만 보긴 하지만). 2장까지만 읽어도 저자가 서문에 쓴 "정치철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읽을 수 있다."가 기만임을 간파할 수 있다. '제작자적 이상', '도적적 자의성'과 같은 아리송한 개념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그래프를 동원하는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또한 대체적으로 단어와 문체의 결이 추상적이고 딱딱하다. 따라서 끝까지 책장을 넘기기 위해서는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요구한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정치철학에 있어 강력한 시야를 얻게 되는 건 사실이다. 특히 존 롤스부터 공동체주의자에 이르는 비교적 최근의 사상까지 아우르기 때문에 그들의 주요 논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훌륭한 2차 문헌으로도 볼 수 있다. 나는 <정의론>과 로버트 노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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