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효용과 '외적'효용을 중심으로
1. 개인적으로 철학의 효용에 대해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자신이 철학자들의 사상과 근본적인 지식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무척이나 재미있는 취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계발의 관점에서 철학의 문을 두드리려는 사람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 서점에만 가도 인문학 트렌드를 업고 탄생한 <철학으로 xx했다> 따위의 책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심지어 인공지능의 미래를 분석한 서적 <에이트>에서는 앞으로 철학 하는 사람이 살아남을 것이며, 새로운 기득권층이 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물론 나는 CEO나 미래학 전문가가 아니므로 철학의 경영적 쓰임과 앞으로의 가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는 비전공자로서 느낀 철학의 '실질적인' 이점만을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2. 먼저 철학 지식 그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가령 당신이 인식론을 공부했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적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내가 경험하는 것이 모두 악마의 환상이거나 나의 뇌가 그저 누군가의 실험체인 '통 속의 뇌'에 불과하다는 회의주의자의 주장은, 적어도 우리가 겪어왔던 상식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매트릭스>, <트루먼 쇼> 또한 유사한 인식에서 출발한 영화 작품이지 않은가? 나아가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가?"를 논하는 인식론의 주 테마는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한 번쯤은 다시 고찰하게 만들어 준다. 우주에 달이 떠 있다는 것을 직접 가 보지 않고 어떻게 아는가? 내일 해가 뜬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귀납과 관련된 이 질문들은 과학철학과도 연결된다.
3. 그리고 정치와 윤리에 대해 좀 더 정돈된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정의'라는 키워드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논란이 되는 주제인데, 우리는 이에 대해 특수한 직관과 경험, 이데올로기에 의존할 뿐 구체적으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만약 분배에 대한 존 롤스와 로버트 노직의 의견차에 대해 들어본다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전제,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사상을 자연스럽게 옹호하게 되는 내 처지와 환경과는 별개로 말이다. 더불어 위와 같이 까다로운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나면 우리 사회의 법이 뿌리내린 지점 또한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법의 정당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벤담과 몽테스키외 같은 수많은 사상가들의 영향 속에서 그 기반을 닦아나갔다. 한편으로 마이클 샌델의 유명한 강의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공리주의와 칸트 윤리학의 대립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4. 안타깝게도 여기까지가 내가 기분 좋게 이야기할 수 있는 철학의 '내적' 효용이다. 어쨌든 철학은 콘텐츠 자체가 마이너하고 오래된 학문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알아두면은 교양으로서는 나쁘지 않아도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수학과 더불어 완전히 이론 그 자체인 분야인 만큼, 누가 듣기에는 등따숩고 배부른 소리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다. 철학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집요하게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 고유의 매력은 부정할 수 없고, 현재 우리 정신에 어떤 형태로든 위대한 사상가들의 흔적이 존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말했듯 "자신은 어떠한 지적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현실적인 사람도 실은 이미 사망한 어떤 경제학자의 정신적 노예에 불과하다." 즉, 우리 사회에서 세상을 바꾼답시고 떠돌아다니는 정치사회적 메시지들은 결국 누군가의 레퍼런스들일 뿐이다.
5. 다음으로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효용, 즉 철학의 '외적' 효용이 있다. 자기계발로서 철학을 읽어보려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텍스트에 대한 이해력이 매우 높아진다. 애초부터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우리는 방대한 양이 아니라 이해 단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당신이 대충 외우고 넘어가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2차 문헌이나 나무위키를 뒤져보는 '티키타카'를 겪게 되고, 이는 결국 사고력의 신장으로 이어진다. 철학 서적과의 '티키타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시중에 돌아다니는 보통 서적들은 아마 시시하게 느껴질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미 '사고적으로' 3대 500을 치는 당신은 5kg 아령을 드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춤추기 등의 물리적인 움직임을 동반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배움은 결국 텍스트 이해와 직결된다. 나의 경우 흥미로 수강한 저작권법 수업을 별 어려움 없이 배우고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참고로 난 수학 전공이다).
6. 다음으로는 논리학의 영역이다. 분석철학에 관심이 생기면 결국 기호논리학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데, 피하지 않고 끄적거리다 보면 명제논리와 참거짓 등의 기초적인 논리학 개념에 익숙해지게 된다. 일단 논리학을 알고 시작하면 대기업 적성의 언어 파트 하나는 편하게 먹고 들어갈 수 있다. 성적은 둘째치고 인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일단 큰 이득이 아닐까? 그리고 알다시피 로스쿨 시험인 LEET의 기본이 논리학이다. 철학을 통해 기초 논리 개념과 복잡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즉 '글깨나 읽을 줄 아는' 친구들은 LEET를 큰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 나는 과정의 편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결과의 좋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하라(내가 로스쿨 학생이었다면 결과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흠). 어쨌든 논리의 영역은 여러 시험에서 요구되는 역량이기에 나름 철학 공부의 큰 외적 이득이라고 간주할 수 있겠다.
7. 마지막으로 철학은 생각 정리에 영향을 끼친다. 엥? 생각 정리는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맞다. 사실 상기한 '생각 정리'라는 개념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체감하지만 다소 넓게 작용하는 부분이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령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하자.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과연 '문제'인가? 문제가 맞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이것이 시간과 금전의 문제인지, 아이디어와 레퍼런스의 문제인지, 단지 기분과 운에 좌우되는 문제인지, 노력과 투자의 문제인지 생각한다. 누구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문제의식을 명료화한다(경영학의 용어로 말하면 MECE의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적 사고'이자 '좋은 생각 정리'의 예이다. 비슷한 방법으로 철학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화하는 것, 즉 기획에도 도움을 준다. 철학적 사고와 개념들을 끄집어내고 그것들을 잇는 논리까지 갖출 수 있다면, 설득력 있는 기획서 작성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철학은 생각에 드리운 안개를 제거하는 기술이다.
8. 자, 이 지루한 글을 완독한 당신에게 철학을 공부할 마음이 조금 생겼을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전제를 빠뜨렸다. 이 효용들은 철학을 폭넓게 읽어보아야 얻을 수 있으며, 철학적 사고에 익숙해지는 길은 다소 험난하다. 한 마디로 가성비가 썩 좋지 않다. 나의 경우는 독서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전공의 영향으로 추상적 표현에 익숙하다는 등의 우연이 작용했다(학교생활도 대충하고 책만 봤다 ㅎㅎ). 그러니까, 가성비는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철학적 효용은 애정 뒤에 저절로 따라오는 무언가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데카르트가 코기토 어쩌구 했대!", "루소의 일반의지는 이런 개념이래!",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옹호했대!" 등의 단편적인 철학사 지식 조각으로는 철학적 사고를 절대 보장할 수 없다. 여기에는 항상 "왜?"를 붙이는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