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스토리텔링에서 지켜야 할 것
헤이즈 '너의 이름은'을 중심으로
1. 지난번에 여자친구의 '교차로' 스토리텔링의 무용론에 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직관과 괴리되어 복잡한 설명을 요하는 스토리텔링은 BTS의 사례처럼 케이팝에서 항상 유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수준의 스토리텔링이 바람직한가? 세계관 설정 및 스토리텔링은 한낱 케이팝의 몽상에 불과한가? 우리는 비판도 물론이지만 바람직한 방향도 함께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2. 먼저 용어부터 정확히 하자. 여기서 논하는 스토리텔링은 콘셉트와 가사의 주제의식과 메시지 그 이상의 단계를 말한다. 즉 음악과는 별개로 세계관, 멤버 간의 상징, n부작 등의 구체적인 설정이 존재한다. 이것들을 처음으로 실험에 옮겼던 그룹으로는 SM의 엑소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원피스에서나 등장할 법한 자연계(?) 능력과 사이버펑크의 냄새가 풀풀 나는 배경 설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그 이후 BTS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부분을 취하고 더 설득력 있는 모델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추상적이면서 덜 유치한 세계관이 등장했다. 그리고 현재 후배 그룹인 TXT는 물론이고 BTS의 성공 신화에 발맞춰 타 기획사 또한 최소한의 설정을 염두에 두고 그룹을 런칭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3. 여기서 나는 '강한' 스토리텔링과 '약한' 스토리텔링을 구분하고 싶다. 전자는 스토리텔링이 그룹의 정체성에 묶여버린 BTS, TXT와 같은 상태이다. 강한 스토리텔링은 앞으로 발매할 모든 음악과 주제의식, 콘셉트 빌딩 등 모든 세부사항의 기본 전제조건이 된다. 후자는 이러한 초기 조건에 비해 어느 정도 유연한 설정이다. 즉 앨범마다 구체적인 콘셉트는 존재하지만 세계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아이즈원의 꽃 3부작, 레드벨벳의 페스티벌 3부작 등등 시즌별로 콘셉트를 잡고 갈 때 쓰는 방법이다. 물론 여기에도 디테일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 소비자들이 스토리텔링을 이해하고 말고는 큰 문제가 아니며, 대부분의 셀링 포인트를 음악과, 비주얼 등 소비자들의 1차적인 직관에 호소한다.
4. 나는 아직까지는 약한 스토리텔링이 더 좋은 모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콘셉트가 다섯 손가락 이내로 나뉘는 아이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고, 초기 세계관 단계에 구애받지 않기에 계절감을 주거나 음악 스타일에 더 비중을 주는 등 필요할 때마다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분명 강한 스토리텔링은 그룹에 관한 깊은 이해도를 동반하면 꽤 강렬한 쾌감은 있기 마련이다. 국내에서 대박을 터뜨린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 또한 결국 강한 스토리텔링의 형태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이돌은 가상의 존재가 아니기에 스토리텔링에서 뚜렷한 몰입감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아니면 TXT처럼 긴 뮤직비디오(Eternally)를 따로 제작해서 스토리텔링에 보조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러나 기획사 입장에서 뮤직비디오 외적으로 많은 돈을 새롭게 때려박기는 쉽지 않다.
5. 한편 나는 적당히 잘 기획된 앨범의 예시로 최근 '너의 이름은'을 들고 싶다. 겉으로는 극적인 콘셉트나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깊이 들어가면 흥미를 느낄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지금부터 이어지는 해석은 주관적인 해석이므로 유의하도록 하자). 일단 곡 자체를 보면 특별히 콘셉츄얼한 느낌은 없는,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헤이즈식 음악이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이라는 제목에 눈이 간다. 이는 한때 유명했었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름이 아닌가? 이를 인지하고 뮤직비디오를 보면 조금 더 흥미롭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는 시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너의 이름은' 뮤직비디오에서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두 가지 시간대를 병렬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감상 포인트. 뮤직비디오에서는 과거의 시간대가 현재와 가까운 시점이 아닌 일제강점기, 개화기 시점이다. 나는 여기서 <미스터 션샤인>과 같은 인기 드라마와 영화들이 떠올랐다. 만약에 과거를 어린 시절 등의 뻔한 시간대로 했다면 정말 지루한 뮤직비디오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나는 '너의 이름은'이 소소하지만 센스 있는 장치를 곳곳에 주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6. 더불어 '너의 이름은'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앞서 설명한 자질구레한 배경을 모두 인식하지 못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너의 이름은'은 누군가에게는 헤이즈가 여태 커리어에서 줄기차게 만들어온 웰메이드의 사랑 노래일 수 있다. 나와 같은 팬들에게는 뮤직비디오를 포함해서 잘 만들어진 선물이 될 수 있다. 외국인이나 드라마 팬들은 곡과 상관없이 뮤직비디오의 개화기 배경을 보고 여타 케이팝 뮤직비디오와는 차별화된 요소로 감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던 이들은 곡의 제목으로부터 특별한 감상 포인트를 찾았을 수도 있다. 이처럼 잘 만들어진 콘텐츠는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소비자층에서 보아도 매력적인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나의 이론을 아이돌에게 그대로 적용하자는 말은 아니다. 단지 스토리텔링, 상징. 세계관 모두 폐쇄적인 형태가 되어서는 안되며, 많은 부분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팝의 근본은 여전히 음악과 비주얼에 있다. 철학에서도 비슷하게 칸트가 한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치겠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