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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Oct 09. 2020

딸인 줄 알았어요

어머님의 입원.

무릎과 허리가 아프셨던 어머님.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도 어머님은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셨다. 그 이유는 몸이 불편한 아버님 때문이셨다. 어머님이 수술을 하시고 나면 아버님이 집에 혼자 있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둘째 이모님이 먼저 허리 수술을 하셨는데, ‘왜 진작 이 수술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이런 이모님의 말씀을 듣고, 어머님은 수술을 결정하셨다.     

어머님이 수술을 결정하시고 서울에 올라오셨다. 걱정이 앞섰다. 왜냐하면, 시어머님 같은 이모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8개의 눈이 나를 얼마나 감시할 것인가? 둘째 이모님이 허리 수술을 하셨고, 어머님이 이모님들과 함께 둘째 이모님의 병문안을 오신다는 말에 우리 가족은 이모님이 입원하신 병원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남편의 이모님들, 남편의 삼촌, 남편의 둘째 이모님의 며느리 등등 20명 여명이 있었다. 그런데 이모님들이 둘째 이모님의 며느리 그러니까 내게는 형님인 그분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 이상한 기운을 느낀 나는 형님이 안색도 살펴보았다. 역시 형님의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남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형님의 집은 병원과 1시간 넘게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고, 나이 어린 딸도 있다. 그런데 이모님들은 시어머니가 입원을 했는데 어떻게 며느리가 되어서 한 번도 시어머니의 병문안을 오지 않냐며 형님의 헌담을 하셨다. 나도 아이를 키워봤지만 어린아이를 데리고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해 1시간 넘게 어디를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모님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형님은 주말에 아주버님과 함께 병문안을 오셨단다. 이모님들이 주장하시는 건 형님이 혼자 시어머님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는 이유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본인의 딸들에게도 그러실 수가 있었을까? 특히, 그중 여론몰이를 하시는 이모님이 있었다. 바로 큰 이모님이시다. 나이가 80이 넘으셨는데도 본인의 기준에 맞지 않은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다니신다. 그 이모님을 보며 나이 드는 것이 참 무섭기도 하다. 이런 큰 이모님 때문에 둘째 이모님은 더욱 속상해하셨다. 형님 또한 마찬가지.. 그렇게 큰 이모님은 둘째 이모님의 집안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셨다.      


큰 이모님은 어머님이 입원하시고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오셨다 왜냐하면 둘째 이모님도 병원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머님은 수술을 하셨다. 나는 집에서 병원까지 거리가 가까기도 했기에 어머님을 뵈러 매일 병원에 갔다. 어머님 병원과 더불어 세인이 재활도 다녀야 했던 했던 나는 좀 버겁기도 했다. 아이들이 학교 끝나는 시간에는 돌아와야 했기에 오전에 어머님 병원에 들렸다. 엄마가 끓여주신 곰국도 갖다 드렸고, 어머니가 맛있어하실 음식들도 사다 드렸다. 남편은 남편대로 회사 끝나면 어머님께 가서 어머님과 담소를 나누며 집에 오곤 했다. 그에 배해 병원에서 차로 10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사시는 형님은 직장 다닌다는 이유로 병원에 자주 오시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까지 시어머님께 해 드려야 하냐고 하겠지만, 나는 어머니가 나의 시어머니 이전에 한 여자로 어머님을 보았다. 남편을 근 20년 넘게 간호한 어머님이 안쓰러웠다. 흔히 아플 때가 가장 서러운 법이 아니던가? 그래서 병원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더 잘해드리고 싶었다.

무릎 수술은 수술을 하고 나서 본인의 재활이 중요하다. 병원에서도 재활을 해주지만 본인이 스스로 움직이고 재활을 해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재활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님을 오래 간호하신 어머님은 본인이 재활의 중요성을 깊이 아시기 때문에 틈만 나면 스스로 재활을 하셨고, 그래서인지 어머님은 회복이 빨랐다. 어머니가 퇴원 하시 며칠 전.. 어머니께서 흰 봉투를 나에게 주셨다.


어머니: 미선야.. 그동안 나 간호하느라 힘들었지? 정말 고마웠다. 내가 입원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고 느끼는 게 많다.


어머님이 여러 가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리고 어머님이 주신 봉투에는 20만 원이 들어가 있었다. 시집와서 오로지 나를 위해 쓰라고 주신 용돈! 어머님께 감사했다.      

어머님이 퇴원하시는 날 나는 어머님을 뵙지 못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을 가서인지 나의 몸은 몹시 아팠다. 병이 난 것이다.

어머님이 퇴원을 하시면서 어머님께 전화가 왔다.

"미선아.. 나 때문에 아파서 어떻게 하냐? 정말 고마웠다. ”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병원에 같이 입원했던 다른 분들이 어머님께 매일 오는 분이 딸이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닌데.. 우리 며느리 데요”

“며느리예요??어머니.. 딸인그러자 모두 하나같이 “며느리에요?? 어메..딸인 줄 알았어요!!” 하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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