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추억 타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 Jan 24. 2018

2년 전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쏟아지는 햇살

'쿠르릉 쾅'

난데없는 천둥소리에 눈을 떴다. '천둥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지속해서 내릴…' 타이머를 맞춰 둬 저보다 먼저 깨어있던 TV 속에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비볐다. 아직 뻑뻑하기만 하다. 천장을 향해 쭈욱, 두 팔을 뻗어본다. 그리고 다시 매트리스 위로 힘없이 떨어진 팔. 숨을 잠시 작게 고르다 숨을 짧고 크게 내쉬며 힘껏 상체를 일으켜본다. 그 속도만큼이나 굽어진 등을 타고 한기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겨울이네. 비가 내리는 겨울. 바닥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눈을 다시 한번 비볐다. 그와 동시에 하품이 크게 나온다. '한숨을 내쉬는 것보단 낫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마저 했다.


-


아침 10시.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성공을 손에 넣은 사람들의 일대기 속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기상 시각이라고 한다. '해가 중천인데 이제야 일어나면 어떡해?!'라는 말에 '해가 중천이니 이제야 일어났지요'라고 대답하곤 했었지. 밝을 때 일어나 밝을 때 자고 싶다는 말에 어머니가 입을 떡 벌렸던 것이 참 우스꽝스럽단 생각도 했었는데.


*


대충 옷이라 불리는 것을 걸쳐 입고서 집 밖을 나섰다.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쉰다. 콘크리트가 뿜어내는 공기를 마시어 무엇하겠느냐마는 마실 공기가 이뿐이니 어찌하랴. 머리를 두어 번 가볍게 좌우로 돌려보곤 복도의 고요한 분위기를 가르고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자 '우우웅'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온다. '띵'하는 소리에 운동화 앞코를 보며 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리고 조금 더 밝은 공간으로 몸을 옮긴다. 눈이 아주 살짝, 아주 미세하게 살짝 더 부신다. 형광등은 대체 누가 개발한 건지. 이 머리만 아픈 빛을 당장이라도 없애고 싶단 생각을 잠깐 스치듯 했다.


-


"봉지도 필요하신가요?"


고개를 가볍게 가로 젓고는 점퍼 안주머니에 꽂아놨던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탁, 탁탁, 스윽, 탁!' 푸른색 장갑을 끼고서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으니 어느새 카드가 다시 눈앞으로 돌아왔다.


*


오후 4시.

집으로 돌아와 TV만 보다 문득 시계를 보니 살짝 두통이 찾아왔다. 분명 직접 잡은 약속인데 갑자기 왜 나가기 싫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약간은 울적한 기분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변 정리를 해본다. 그리고 나서야 나갈 채비를 한다. 하는 동안 기분이 점차 괜찮아지기 시작한다. 알다가도 모를 속이다.


-


오랜만에 만난 친우의 얼굴이 썩 밝아 보이진 않는다. 고민이 있는 걸까,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걸까, 하루하루가 고된 걸까. 궁금한 점이 많지만 묻지는 않는다. 상대도 아마 털어놓고 싶은 것을 참고 있을 테니까. 질문하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미안한 기분만 들뿐이다.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기 가장 편한 주제는 지난 주말에 본 TV 프로그램이란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래도 대화하는 순간순간이 즐겁다. 그래서 친우인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친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 반찬을 깨작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연애는 하고 있던가?' 문득 딱 끼워 맞춘 퍼즐처럼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 생각났다. 물론 묻지는 않을 테지만.


*


밤 1시 30분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같이 가볍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집으로 돌아와 빠르게 씻고 나와 군데군데 놓인 박스 몇 개를 뒤지다 작은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더 깊은 생각에 빠지기 전에 책을 읽어야 한다. 울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눌러 담고 첫 페이지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대로 혼자 두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책 속으로 정체불명의 행인1로 가장한 자신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것이다.


-


마치 깃털처럼 가지런히 얼굴 옆에 놓인 두 손. 바로 앞 무겁게 떨어진 책. 어두운 방 안. 빛이 쏟아지기까지 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매거진의 이전글 악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