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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Apr 07. 2020

응급실

어렵지 않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게 어렵다

'누구나 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겠다.' 어렸을 땐 그렇게 생각했지. 아무나 쉽사리 될 수 없는 존재. 소설을 읽다 무거운 수식어로 점철된 주인공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 드라마를 보다 솜털마저 곤두세우게 만드는 배우에게서 느껴지는 눈빛. 음악을 듣다 심장을 강하게 조여 오는 가수에게서 느껴지는 애절함. 그런 것을 갖고 있으면 그런 존재가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었지.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걸까? 인생의 주인공. 등장인물이라곤 오롯이 나 혼자인 인생에 주인공이 되고자 얼마나 발버둥 치고 있었는지. 문득 나는 어린 날의 내가 했던 그 깜찍한 생각이 떠오르면 몸서리치며 부끄러워하곤 해. 내가 나를 바보 취급하는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기분이야.


너무 일찍 자란 키에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발 끝으로 이 지구를 밀어내면 한 뼘 늘어난 키만큼 한 뼘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걸 알았지. 자괴감이 물밀듯 밀려와 숨 막힐 듯 목을 죄어오곤 해. 나는 왜 이렇게 나를 바보로 만들며 살아야만 했을까? 나는 왜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제 나를 가엾게 여겨야지. 행복한 나를 아무도 가엾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내가 나를 가엾게 여겨야지.


시는 어렵지만, 말은 쉽지. 약속은 어렵지만, 장담은 쉽지. 사랑은 어렵지만, 동정은 쉽지. 누구나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긴 어렵지만, 누구나가 되는 건 쉽듯이.


지난날을 잊긴 어렵지만, 그 날의 너를 미워하긴 쉽듯이. 그러니 나는 나를 가엾게 여겨야겠다. 더 늦기 전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 나를 빼앗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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