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질문에서 이어진 생각의 타래들
"그래서 좋아? 싫어?"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고 대답 대신 먼저 들었던 생각은 왜 꼭 둘 중 하나를 택해서 답해야만 하는가 였다. 우리는 아날로그에서 살아간다. 디지털은 컴퓨터 속 세상이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아날로그이고 그래서 연속적이며 시시각각 변하고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에 기반한 의사표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분법적인 선택을 유도하는 질문에 거부감이 들었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질문에 선택을 해야만 할까?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수학 문제의 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면 선택이란 우리의 여러 생각과 감정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골라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아날로그 적인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디지털화시키는 과정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생각과 감정은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연속적이며 시시각각 변한다. 그렇기에 선택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중요하지만 또 그만큼 어렵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조금 더 나은 선택이었구나 혹은 그런 선택이 있었구나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선택지가 단 두 개뿐이라 하더라도 그 선택은 쉽지 않을 수 있고 때로는 불가능하다. 사실 우리 생각과 감정에 관한 모든 선택에는 선택하지 않을 선택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며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고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삶에서 답을 찾는 과정도 비슷하다.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의 답을 찾기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 그리고 존재가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그 답을 찾았다면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인 것이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가상현실 등을 필두로 소위 4차 산업혁명을 겪고 있는 지금을 우리는 디지털 시대라고 부른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수많은 디지털 기기들과 우리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기술들을 보면 과연 틀린 말은 아니다.
디지털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물질인 원자(atom)를 비트(bit)에 대응시켜 모든 것을 0과 1로만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은 명확하며 정확하다. 또한 가공(변경)이 용이하며 효율적이다. 그래서 되돌리기 쉽고 편리하다. 하지만 인위적이며 공허함이 존재한다.
반대로 아날로그는 자연스럽고 연속적이지만 유동적이고 모호하다. 그 연속성 안에 과정과 기다림이 있다. 그렇기에 되돌릴 수 없고 불편하다. 하지만 그 과정과 불편함에서 오는 감성과 이야기가 존재한다.
인류는 그동안 아날로그적인 삶의 불편함을 기술, 즉 디지털로 해결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 디지털에서 오는 공허함의 해법을 아날로그에서 찾는다. 좀 더 정확히는 0과 1에 감성을 추가한 디지털의 아날로그화라고 할 수 있겠다. 소위 말하는 '디지로그'다. 누군가는 기술에 의해 구현된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실제 아날로그의 재생이라기보다 새로운 디지털, 즉 기술의 발전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발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디지털이 다시 아날로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은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지만 아날로그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일류의 진화와 발전이란 이 둘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아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개념들은 연결되어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도 마찬가지다. 둘은 연속적이며 상호보완적이고 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화하면서 우리의 삶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더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것은 기계다. 이런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기술을 감당하기 위한 기술적 올바름 그리고 인간의 기술을 선택할 권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의견에도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