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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라키 Dec 21. 2020

비우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feat. 신박한 정리

금요일 늦은 퇴근으로 바로 잠들기는 아쉬운 마음에 시간을 보내다 역시나 늦잠으로 피곤한 주말. 느지막이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 나자 오래간만에 정리병이 도졌다. 이번 타깃은 옷방이다.


언젠가부터 쇼핑을 자주 하지 않아 사계절 옷을 다 모아도 얼마 되지 않는 양이지만 작은 옷장 두 개로는 항상 부족하다. 날이 추워지면서 꺼낸 길고 두꺼운 패딩들은 걸어둘 자리도 애매하다. 분명 가을이 지나갈 때쯤 정리를 한 번 했는데 아직도 필요 없는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옷장은 터질 것 같은데 입을 옷이 없다는 말이 묘하게 공감이 갔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입으려고 비싼 돈 주고 사서 묵혀두고, 주구장창 입어서 늘어지고 헤져 더 이상 안 입는데도 그놈의 정 때문에 버리기 아쉬워 걸어두고, 사고 보니 마음에 안 들어서 그 상태 그대로인 옷들까지. 매번 정리를 할 때마다 맘을 먹었다가 언젠간 다시 입을 수도 있겠지 하면서 쌓아둔 옷들이 몇 해가 지나도 같은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과감히 결단을 하리라 다짐하고 골라낸 옷들이 수북이 쌓여갔다.


그렇게 옷들을 정리를 하다 보니 새삼 옷장에서 나를 만나게 된다.


튀는 것보다는 소리 없이 묻어가는 성격을 반영하듯 화려하거나 특이한 색의 옷은 보이지 않았다. 온통 검은색, 회색, 흰색. 무채색의 향연이었다. 옷들의 상태도 그랬다. 물건이고 음식이고 심지어 사람조차도 하나에 꽂히면 올인하는 것처럼 매번 입고 또 입어서 낡을 때로 낡아있지만 여전히 한가운데 당당히 걸려있는 옷들, 그래도 새로운 시도는 해봐야지 하면서 도전했다가 높은 확률로 실패하는 신메뉴처럼 사서 몇 번 입지 않고 새 것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옷들이 있다. 신기하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구매한 시기는 다르지만 느낌은 모두 비슷하다. 심지어 10년 가까이 지난 옷들 조차도 지금 입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여전히 내 맘에는 쏙 들었다. 여태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남아 있었던 이유일 터였다.


한바탕 비워내고 난 자리에는 나름 치열했던 선택에서 살아남은 아이들만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여유가 생겨서 인지 당연하게 매번 입던 옷들과 숨어있던 옷들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수십 벌이 사라졌지만 내년이 되면 곧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 같은 아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왠지 모를 허전함과 함께 비운 자리를 채울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한다.



정리를 끝내고 쉬려고 앉았을 때 문득 우연히 잠깐 보고 지나쳤던 예능 하나가 생각났다. 이름부터 신박한 tvN의 신박한 정리다. 별다른 고민 없이 몇 편을 재생했다. 이 예능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변화를 보여준다. 바뀐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신박을 넘어 놀라운 수준이다. 프로그램 컨셉도 정리의 결과만큼이나 심플하다.


"나만의 공간인 '집'의 물건을 정리하고 공간에 행복을 더하는 노하우를 함께 나누는 프로그램"


여기서 보여주는 정리의 기술은 바로 비우기와 재배치다. 돈을 들이면 정리가 될 줄 알았지만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정리는 돈이 아닌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어느 출연자의 말도 와 닿는다. 아무래도 나름의 전문성이 필요한 재배치는 전문가에게 맡기지만 그 시작인 비우기는 출연자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한다.


매회 새로운 출연자들이 "언젠가는 쓰겠지"하는 마음으로 또는 "추억이 있는 물건"이라는 등 같은 이유로 버리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비워간다. 비워진 후에는 재구성을 통해 전혀 새롭지만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집은 변화한다. 이런 변화는 위로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기도, 빡빡한 삶에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추억과 함께 살고 있다면서 비우지 않고 정리하는 법을 묻는 누군가에게는 비워야 소중한 것들도 보인다며 파묻혀 있던 추억을 찾아 발견해 주기도 한다. 이것이 아마 정리의 힘이자 내가 정리를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때로는 잠시 쉬어 가고 싶거나 마음의 안정이 필요할 때, 새로움이 필요할 때 예정에 없던 정리를 나도 모르게 시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듯싶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모두의 공통적인 이유처럼 우리가 가진 것들은 모두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정리란 삶에서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무조건 비우기만 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아는 것이다. 신박한 정리에서도 비운 뒤 남은 것들만 활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때로는 새로 구입을 하고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훨씬 더 나은 정리를 보여준다.


나름대로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많이 들여놓지 않으려 하고 정리도 비교적 자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할 때마다 매번 비울 것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비우다 보면 비로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단 물건 만이 아니다. 거기에 깃들어 있던 기억이나 추억 그리고 그것들의 소중함까지.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나였고 앞으로도 나인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정리를 마치면 왠지 모르게 머리도 마음 한편도 깔끔하게 정리된 것처럼 가벼워지고 기분전환은 덤으로 따라온다. 그리고 이렇게 비워진 공간들은 다시 한번 꼭 필요한 것들로 채워질 준비를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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