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종합병원 간호사 11년 차의 퇴사 후 기록 (5)
오래간만에 글을 쓴다. 이전까지는 한 권의 책을 읽고 정리하고 글을 올렸다면 이번에는 두 권의 책을 번갈아 보면서 각각을 정리하랴 다시 한번 정독하다 보니 글을 올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 같다.
백수 생활 29일 차가 되니 시간이 흐르는 게 아쉽다. 내년 1월부터는 다시 이런 여유 없이 바삐 돌아가는 하루하루가 시작될 텐데(물론 일할 때처럼 몸이 힘들진 않겠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로부터 꼼짝 못 할 것만 같다.) 너무 바삐 '뭘 더 할 수 있을까'라고 나를 다그치기보다 '나에게 좀 더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지'라고 다시금 마음을 먹고 있다.
생각보다 루틴을 정해놓으니 정해 놓은 것들을 그래도 다하려는 노력으로 하루하루가 '나 뭐 했지?'라는 허무해지는 느낌 없이 흘러간다. 이번 주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야외 러닝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덕분에 단지 내 피트니스 센터에 들러 운동을 하고 사우나까지 즐기고 오는 날이 늘고 있다. 오히려 lucky 한 일인가?
스트레칭을 하루도 빠짐없이 적어도 30분은 하면서 내 몸 상태에 대해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어깨, 목, 등의 상태가 정말 좋지 못한 편인데 매번 통증에 시달리며 마사지를 받으면서 연명하는 게 다였던 지난날이었다. 날마다 아픈 몸에 집중하며 펴주고 스스로 마사지해 주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정신없이 일해서 버는데만 급급했던 지난날, 그래도 덜 쓰고 모아가며 지금의 집을 매수하긴 했지만(갚아야 할 빚이 한가득이긴 하다만) 미뤄오던 경제 관련 공부들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이젠 또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태이므로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자극이 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속 시끄러운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있는 거라고도 볼 수 있는 요새 나의 일상이다.
극 I의 침대 위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ISFP인 내가 백수 생활 가운데서도 간간히 지인들과 만남 약속을 가지고, 야외 러닝, 운동, 도서관 이용 등을 위해 규칙적이 외출도 하며, 사회 경제면에 등장하는 뉴스, 기사들도 읽으면서 타인과의 연결을 놓지는 않고 있다.
때마침 '이토록 다정한 개인주의자'라는 책을 우연히 접했고 소재 자체가 우리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것이라 매우 빠르게,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누가 맞고 틀린 건지 감이 오지 않는 속 시끄러운 세상에서 이슈가 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필자는 이 속 시끄러움 속에서 내 마음이라도 평화롭게 지키려면 이것저것에 모두 관심을 끊고 나를 우선으로 위하는 개인주의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고 한다. 다만 극 내향형에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한 나의 경우도 그러하듯 우리 인간은 혼자인 상태를 추구하면서도 서로를 아쉬워하는 존재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필자는 '다정한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나 자신이 양보할 수 없는 가치, 관심, 이해관계 등에 중심을 두되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래부터는 각각의 챕터의 핵심을 정리해 보았다.
정리를 하면서도 '난해하다' '어렵다' 싶은 이슈들이 꽤 많았다. 중요한 건 나 스스로의 확실한 가치관, 편협하지 않는 관심, 이해관계가 있어야 당장에 해당 이슈가 나에게 닥쳐왔을 때 그나마 덜 후회스럽게, 그나마 조금 더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
'쉬는 날 출근한 것도 모자라 상사한테 혼이 나서 방에서 울고 있는 동생. 동생의 얘기를 듣고 혼날 만하다고 생각되어 "둘 다 잘못했네"라고 반응했다가 쫓겨난 언니'
당시에 신중, 배려함을 더해서 격양된 동생의 감정을 어루만져 가라앉히고 동생이 평정심을 회복한 뒤에 조심스럽게 동생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이를 교훈 삼아 발전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더라면? 이처럼 신중하고 배려하는 솔직함 만이 미덕이라 부를 수 있다. 또한, 과연 동생의 상황을 100%로 팩트만 가지고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가족이라는 존재는 가장 가깝고 편하고 소중한 존재임에 분명 하나 이런 상황에서 상대에게 덜 상처 주고, 상대를 진정으로 위로, 지지하려는 배려심을 발휘하는 것은 남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평소 내가 남에게 하던 딱 그 정도의 신중함, 배려만을 갖춰도 가까운 가족 사이에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2.
자동차에 시동이 안 걸린다는 여자의 반응에 배터리 문제인지 다그치는 남자. 이에 대해 "지금 차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라며 화를 내는 여자. '기술적 조언이 필요하면 기술자를 불렀지, 왜 너한테 전화했겠어. 푸념 좀 들어봐 주고 공감해 주면 안 돼?'의 마음인 여자. '결국 자동차가 말을 안 들어서 문제인건데 어떻게든 같이 해결해 보자는 내 말에 왜 딴 소리만 해?'라는 답답함이 드는 남자.
여자와 남자는 태어날 때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살다 보니 마치 다른 별에서 온 다른 생물처럼 여겨질 정도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갖게 되기 십상이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데 <국부론>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동감,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경우에도 타인과 감정을 나눌 수 있고 그렇게 감정을 나눌 때 행복해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다만 감정이 미묘하게 도를 넘어버리기 쉬운데, 이때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상대의 행동이 옳은지, 나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등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된다. 이때 역지사지의 방법을 통해 상대가 행동하게 된 원인을 동감으로 찾고, 이성적인 공평한 판단이 필요하다. 감정과 이성의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건전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요새 MBTI의 유행으로 몇몇 사례들로 "너 T야?" "뼛속까지 F네" 상대를 쉽게 유영화한다. 물론 개인의 성향이 좀 더 감성적이거나 이성적일 수는 있다. F에 상당히 가깝고, T에 상당히 가까운 배우자와 사는 나도 극히 공감하는 바로, 상황에 따라 감정과 이성의 적절한 조화, 적절한 배합은 매우 중요하다.
3.
라떼는... 이 말만 써도, 자기들 조금만 불편해지는 상황 오면 또 꼰대몰이, '굳이 왜, 너한테 지장 안 가잖아' 하는 마인드. 그럼 체계와 질서는 왜 있는 건지? 꼰대 취급해도 무시하고 할 말은 할 필요 있지 않나. 기본도 안 된 것들이 충고를 비방으로 받아들이는 듯.
과거를 말하는 건 모두 꼰대일까?
단순한 우연에 의미와 법칙을 부여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언급한 흄. 과거를 말하되 과연 우연에 대한 흄의 경고를 어기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그 경험을 듣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불행이나 좌절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찾지 않고 타인에게 돌리려는 태도와 그에 따른 악감정, '르상티망'을 피해야만 한다.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좀 더 분발하라는 상대의 훈계가 호의와 진실을 담고 있거나 새겨들으면 도움이 되는 때도 있다. 다만 라떼를 입에 올리기만 하면 무조건 반발하고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가 듣지 않는 곳에서 뒷담화한다면 르상티망이 담긴 것이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나도 어느덧 과거의 경험을 상대에게 말하기도 하고, 과거의 경험을 상대로부터 듣기도 하는 낀세대가 되었다. 중요한 건 진심인 것 같다. 상대가 좀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인지, 만약 그렇다면 듣는 사람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 진심을 헤아릴 수 있다.
4.
고속버스 좌석 등받이를 뒷사람 무릎에 닿을 정도로 뒤로 젖힌 앞자리 승객. 이에 화가 나서 앞자리를 발로 차며 욕설을 하는 뒷자리 승객. 그러나 끝까지 돈 내고 표를 사서 탄 자린데 등받이를 어찌하던 본인 마음이라는 앞자리 승객. 이에 어르신이 불편해한다며 양보 좀 해달라고 부추기는 운전기사.
행위 공리주의에서 파생된 규칙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기본 이상을 실현하려면 최적의 규칙을 찾고 세워야 한다고 본다. 비용이 더 드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의자가 젖혀지도록 만든 이유는 서로 소통하여 협력하면 최대 다수의 행복이 보장된다는 점에 있다. 앞사람의 등받이가 젖혀져서 나의 공간을 침범할 경우 나도 등받이를 젖히면 되고, 개중에 등받이를 젖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경우는 대화나 합의를 통해 각자의 등받이를 조정할 수 있는데, 이를 규칙 공리주의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으로 본다. 모두 자기 입장만 챙기기 바쁘고 소통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잊는다면 이 사회는 점점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 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우리에게 너무 여유가 없어진 것 아닌가 싶다. 처음 화가 난 뒷자리 승객이 당황스럽고 화는 나겠지만 조금 더 부탁하는 어조로, 본인의 난처함을 어필하여 양해를 구했더라면 상황은 좀 달라졌을까? 물론 앞자리 승객의 마인드부터가 납득이 어렵긴 해도 결과는 약간 변화가 있진 않았을까. 여유가 없는 나머지 의미 있는 소통은 사라지고, 마음의 상처만 남는 갈등 상황들은 더 많아지고, 더 각박해져만 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현시점 세상 가장 여유로운 사람으로서 많이 안타깝다.
5.
'담임의 복장 단속'을 시작으로 다양한 학부모의 간섭에 지친 선생님들
품위 유지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규정으로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밀의 무위해성 원칙에서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유일한 근거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경우'인데 그 '피해'란게 무엇인지 모호하다면 올바른 기준이라 보기 어려운 것이다. 불간섭 자유가 흔히 공권력에 의한 노골적 간섭만을 문제 삼기 쉽다. 집단이나 개인 사이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에 따라 한쪽이 다른 쪽의 행동을 조종하는 지배의 문제를 제대로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지배의 자유가 포함된 불간섭 자유가 높아지려면 지금보다 '품위 유지의 의무'가 구체적이고 합당한 내용으로 변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합리적이고 월권적인 자유 억압 행위는 계속될 수 있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집단이나 개인 사이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에 따라 한쪽이 다른 쪽의 행동을 조종하는 비지배의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세상이 좀 더 자유롭고 권위주의에서 탈바꿈화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공권력이 아닌 개인적인 자유 침해가 더 늘어난 느낌이랄까.
6.
'길고양이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주차장에서 고양이들이 자동차 위에 올라가는 경우가 있어 불편하시다면 외부 주차장 이용을 부탁드립니다'
맹자나 칸트, 정약용도 길고양이를 마구 괴롭히고 멋대로 죽이는 일은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사람들이 불편해지고 병에 걸리기도 하며 심적, 물질적 해를 입고 있는데 마냥 방치하거나 심지어 먹이, 안식처를 주어 점점 더 많은 길고양이가 돌아다니도록 만드는 일에는 반대할 것이다. 인이란 타인을 대할 때의 덕이며 의란 스스로를 돌아볼 때의 덕이다. 캣맘의 경우 길고양이를 위하는 마음은 인의 단서가 되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그러려 한다면 인에 어긋난다. 자신의 의만 고집하며 인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캣맘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것 또한 인과 의에 맞지는 않다.
7.
남부 아시아의 어느 나라, 복잡한 시장 골목에서 택시를 잡고 막 출발하려는 한국인 여행 유투버에게 열 살 내외로 보이는 현지인 소년이 '칭쳉총~!'이라고 웃으면서 지나갔다. 이에 분노하여 도망치는 아이를 끝까지 쫓아 매섭게 훈계하고 물러났다.
칼 포퍼의 세 가지 역설 중 관용의 역설, 관용이 지나쳐서 폭력적이고 악랄한 생각이나 행동까지 관용해 버린다면 우리는 관용을 지킬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사상과 정치적 견해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나치 깃발을 금지하고 인종차별이나 나녀차별을 소재로 삼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규제하는 일 등의 경우 반드시 필요한 불관용의 불관용이다. 하나 그 대상, 방식에 있어 아동에게 심각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쌍욕까지 섞어 가며 교육을 했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이 또한 불관용을 관용하는 경우가 될 수 있다. 또한 더한 칭쳉총들에 대한 반감,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8.
동성연애를 한 과거가 있는 결혼을 앞둔 여성이 그녀의 가까운 친구가 예비 신랑에게 과거 동성연애를 직접 말하지 않으면 대신 말하겠다고 선언, 이에 곤경에 처했다.
친구의 경우 곤경에 처한 이 여성에게 충실할 것과, 정직한 결혼 계약이 이뤄지도록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선량한 개인으로서 충실할 것 사이의 딜레마에 놓여 있다 할 수 있다. 친구를 걱정해 주고 감싸 주는 한편 공자나 플라톤의 예처럼 인생의 중요한 계약 중 하나인 결혼이 서로 숨기는 것 없이 공정히 이뤄지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이 그 친구를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신중하고 충분히 고민했더라면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숨기고 싶은 친구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고 친구의 평안과 행복을 우선하는 입장에서 친구를 설득하는 것이 먼저이다. 적어도 동성애를 숨기는 것이 심각한 범죄나 부도덕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9.
착륙 직전, 창 측 자리에 앉은 중년 남성에게 아이를 위해 잠시 자리를 바꿔줄 수 있는지 묻는 어린 소녀의 엄마. 이에 대해 "착륙 뷰보다 세상이 그렇게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더 가치 있는 교훈을 따님께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대꾸하는 남성.
행위 공리주의적으로 보면 양보할 책임을 주장할 수는 있겠다. 다만 저마다 가진 가치관과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부딪힐 때는 판단이 어려워 모든 상황에서 한쪽의 행복이 더 중대하다고 자신 있게 판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누구도 쉽게 판정할 수 없는 판정을 단호히 내려버리고 특정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한 남성의 행동은 부적절하다. 가치관과 충돌할 때는 부정하거나 꺾으려 하지 않으며 심각한 손해를 볼 상황이 아니라면 양보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땅하겠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생각에 양보의 미덕이 마땅찮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서 선의가 실종되고 당장 내 이익이 우선이지 다른 게 대수냐는 인식이 보편화되면 누구도 장기적으로 편하거나 여유로울 수는 없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양보의 미덕이 언제부터 이렇게 마땅찮게 여겨진 걸까. 내가 심각한 손해를 보지만 않는다면 조금은 양보하는 선의가 존재해야 내가 난처한 상황일 때 그런 선의로 하여금 조금은 여유로워지는 것 아닐까. 최근 단지 내 사우나에서 샤워를 하던 중에 챙겨간 바디워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한참을 손에 힘겹게 털고 있자 먼저 "어떤 게 다 떨어진 거예요? 샴푸? 내가 좀 나눠줄게요."라고 선의를 건네신 주민분이 계셨다. 한참, 여태까지도 마음 한편이 푸근해지는 걸 보면 이런 양보, 선의는 더 많아져야 한다.
10.
아이가 아이스크림 가게에 놓고 온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글쓴이. 가게에 있던 학생들이 전화를 받았고 40여분을 이들이 기다려주어 글쓴이는 무사히 아이의 휴대폰을 받아서 집으로 왔다. 경황이 없던 나머지 고맙다는 인사만 한 글쓴이의 남편은 적어도 소정의 사례라도 해야 했던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
상대에게 어떠한 의무를 지워 놓고 그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하지 않는다는 건 부당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행동, 어디까지나 자발적 선행이었던 상황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지고 보상할 의무는 없다. 다만 본인의 입장, 마음만 챙기다가 생각도 못 해 본 일에 대해 추궁당하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생각하는 짧은 여유가 없다면 더불어 사는 세상은 어렵다. 더 나아가 철학자인 피터 싱어의 말처럼 보상을 은근히 기대하거나 주위에서 평판이 좋아지기를 바라서 하는 선행이라도 좋다! 그렇기에 선행에 사례하는 일은 글쓴이에게 필수적인 일도 아니고 당장의 직접적인 이득은 되진 않겠지만 기다려준 학생들에게는 직접적인 이득이 될뿐더러, 더 나아가 추가적인 선행에 대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내가 좀 더 물질적으로 여유로워지면(여유까지는 아니어도 돈을 버는 입장이 되면) 나에게 직간접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하는데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물질적으로 풍요롭냐는 아니더라. 평상시 얼마나 상대의 마음까지 헤아려왔냐는 마음가짐의 습관이 중요한 거더라.
11.
중간고사를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늦잠을 잔 한 대학생. 시험에 20분이나 지각했고 교수가 입실을 거부하는 바람에 시험 응시조차 어려웠다. 이에 부모가 학과 사무실로 찾아가 담당 교수의 연락처를 물었고 이를 목격한 학생들이 인터넷에 비난의 글을 올려 학생은 부모를 원망하며 아예 자퇴를 하겠다 마음먹었다.
'치우치지도 기울지도 말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중용이 고려될 수 있는 상황으로 다만 중용의 정신을 살리려면 누가 봐도 똑 떨어지는 해답을 얻기는 어렵다. 따라서 머리를 맞대어 생각하고 토론하며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면 시험 응시 자격 같은 사소한 규칙을 정할 때도 그런 고민과 합의에 따라 수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12.
미국, 영국, 한국은 CCTV를, 반면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단속이
칸트의 이성의 공적 사용은 자신의 조직 내 위치나 상사의 권위, 조직의 관행 등을 잊고 스스로 생각에 이런 일은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조직 내의 위계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이성의 사적 사용과 더불어 함께 필요한 부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만 타인의 행동을 감시하고 비리를 폭로하는 일의 정의감, 이성의 공적 사용에 서라기보다는 영웅 심리에서, 심지어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샤덴프로이데에서 비롯될 경우를 주의해야 한다. 어느 정도는 필수적인 CCTV 등의 감시체계는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설치와 확대에 측면에서 신중함과 배려는 필요하다.
13.
2019년부터 21년까지 서울에서 행해진 '폭력을 거부하는 폭력시위', 동물권 단체가 고기를 팔거나 요리하는 식당, 업소들을 난입, 기습시위를 벌였다.
발터 벤야민은 한 사회의 법체계가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정립적 폭력, 그 법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보존적 폭력을 합쳐져 체제 수호적인 신화적 폭력이라고 정의했다. 이에 대항하는 폭력으로 기존 질서에 소외되고 학대받아 온 이들을 위해 새로운 정의의 질서를 요구하는 폭력을 신적 폭력으로 불렀다. 동물권 단체는 본인들의 행동을 신적 폭력이라고 생각하나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쾌고 감수 능력이 있냐 여부만으로 생명의 존재만으로 인간과 동물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지? 이에 100%의 사람들이 납득을 하는지? 설령 똑같은 권리가 있다 한들 그들 스스로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지? 인간이 그 뜻을 감정이입하여 삶의 결정권을 대리하는 것은 아닌지? 정의감 중독의 산물은 아닌지? 정말 정의에 부합한 행동인지?(주의 사람, 장기적 관점, 스스로에게 유익한 행동일지?)
14.
소리에 반응해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선인장 모양 장난감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 이에 대해 '아동학대'라고 일컫는 외국인.
아동심리학 전문가들은 돌 되기 전 아이에게는 누구나 일부러 깜짝 놀라게 하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고 한다. 가벼운 장난으로 마음의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아이에게는 놀라게 하는 사람과의 애착관계가 관건이 된다. 다만 자식을 일부러 울리는 부모의 동기를 따져봐야 한다. 어쩌면 열등자에 대한 조롱 및 보호자 지위의 재확인, 아이가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존재의 확실함을 위해서는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심각성은 더해질 수 있다.
15.
"쟤네 같은 멍청이들과 같은 한 표라니"
모두에게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 민주주의다. 누구도 무식한다거나 능력이 뒤진다거나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거나 해서 따돌리지 않는 민주주의가 아마도 나쁘지만(철저히 합리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나쁜 가운데 최선의 정치체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장단점이 있고 참정권을 빼앗아야만 할 만큼 단점이 장점을 압도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16.
(무한리필이 아닌) 회전초밥집에서 애들한테 배부르면 회만 걷어 먹어도 된다고 한 아내에게 그건 좋은 가르침이 아닌 것 같다고 하는 남편
남에게 피해를 (별로) 주지 않으니 하고픈 대로 해라, 무위해성의 원칙에 따라 삼가야만 할 행동이라고까지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환경에 대한 영향은 고려되어야 한다. 밀의 무위해성의 원칙, 칸트의 정언명령 같은 자유주의 윤리학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현대의 생태위기이다. 개인이 해를 끼쳐도 표가 나지 않고 해를 끼친대도 바로 반발과 보복이 오지 않는 자연환경에 대해서는 이런 윤리가 무려하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해서도 사람을 대하듯 배려하고 자신이 입힌 피해를 책임져야 할 필요가 있다. 자녀에게 '내게 바로 보복하지 않는 대사인 자연에 대한 연민'이 자라나지 못하게 막지는 말아야 한다.
17.
부산의 한 음식점에서 뜨거운 물을 들고 가던 종업원과 10세 아동이 부딪혀 아동이 화상을 입은 사고, 음식점에 배상 명령이 내려지자 확산된 노키즈존
내 업소에 들어올 손님을 내가 가려 받을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 힘을 얻다 보니 다양한 노 OO존이 만들어지고 있다. 특정 손님의 출입으로 인한 매출 감소가 폐업 위기를 일으킬 정도일지? 다른 손님에게 폐를 끼치는 손님에게 개별적으로 거부할 권리는 있으나 아이, 노인, 장애인 등등의 출입을 원천봉쇄하는 일은 차별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 무서운 금을 긋는 일이며 저마다 누려야 할 기본값으로서의 자유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일일 것이다.
18.
똑같은 상품의 소비를 다만 돈을 더 내서 빨리 들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인데 이는 새치기의 합법화 아닌가? 아니다, 똑같은 상품도 아니다. 놀이공원 이용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다른 일반 티켓 구매자들은 즐길 여유가 상대적으로 없어지고 짜증까지 생기므로 심리적인 피해자다. 흥겹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상품이 놀이공원인데 '패스트 트랙'상품은 형편없다!
사람은 어떤 상품의 실제 효용만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 지위 등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상품을 소비한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분열을 가져오게 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람의 재력 차이보다도 명예의 차이 때문에 더욱 분개한다. 놀이공원 패스트트랙은 놀이공원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이고 자유롭게 도입할 수 있는 사업 반칙이다. 한편 이용객 측면에서는 의외로 많은 불만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공리적으로 보자면 효용 최적화를 달성한 좋은 대안이고 공동체주의적으로 보면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고 세상을 온통 돈으로만 보게 만드는 부적절한 정책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하는 세상이나 그럴수록 열린 토론을 벌이고 무엇이 더 옳은지에 대한 생각을 모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을 더 바람직하게 만들 수 있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찬반양론이 거셀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는 것, 뒤에서만 불만을 표출할 것이 아니라 공식적이 자리에서 소신 발언할 수 있는 것, 본인의 입장만 관철하기보다 여러 다양한 상황, 입장 등을 고려하여 최선의 방안을 이끄는데 협조하는 것. 어렸을 적부터 학교에서 '회의' '토론' 등의 이름으로 해온 과정이나 실제 적용은 쉽지 않다.
19.
2014년 부산에서 한 발달장애인이 아기를 떨어뜨려 죽게 한 사건
루소, 칸트, 롤스의 사상은 장애인을 배려하는 일은 동정심에서 비롯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우리는 언젠가 장애인이 될지 모르는 상태이며 장애인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각자 어떤 의미에서 상대적 약자이다. 따라서 약점을 배려하지 않고 억압, 혐오하는 게 사회의 규칙이고 상식이 되어버리면 나 또한 언젠가는 그런 규칙과 상식에 따라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장애인과 오히려 가까이 지내는 기회를 많이 가진다면 그들을 이해하고 공연히 두려워하거나 혐오하지 않을 수 있다. 누스바움은 연민의 감정은 타인이 그런 불운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일종의 분노가 동반되어 방향이 엉뚱해질 수 있다고 보는데 이때, 분노를 추스르고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며 연민할 만한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자기감정을 잘 조절하는 철학으로 스토아주의를 든다. 이는 날 때부터 불운을 짊어지고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장애인들에게 올바른 연민을 가질 것을 포함한다.
개인적인 끄적거림: 다만 개개인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가까이 지내는 기회를 늘리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해당 사례처럼 더 서로에 대한 편견과 분노만 가득 찰 수 있다.
20.
150여 명의 청년들이 사망한 이태원 대형 참사. 이후 희생자를 모욕하는 댓글로 받은 고통과 참사의 정쟁화, 중대폰의 조기 해체 등으로 추가적으로 자살을 택한 희생자가 발생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비극에도 내 주변 사람들이 변을 당한 게 아닌 이사 내가 알바가 아니지 않냐는 '알빠노'의 정서. 또한 그냥 어쩌다가 일어난 사고이고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아닌 죽은 사람들이 책임질 일이라는 '누칼협(누가 그 자리에 가 있으라고 칼 들고 협박했나)'. 어쩌면 알빠노, 누칼협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푸념일지 모른다. 모두가 힘들게 사는데 경쟁은 점점 늘어나는 현실, 온갖 사회 모순과 병폐, 구조적 문제에 대해 맞서 싸울 수 없고 그저 본인만의 실수, 노력 부족, 불운 때문으로 쳐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명인 것이다.
또한 당시 '왜 슬픔을 강요하나?'라는 뜨거웠던 국가애도기간 선포에 대한 찬반양론은 뭐든 정치, 정파의 색안경을 쓰고 보려 한 습관이, 어릴 때부터 과도한 경쟁으로 어느새 몸과 마음에 밴 살벌한 개인주의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자연스럽게 올라오려는 연민을 막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각자도생이 최고인 양 자리 잡고 무슨 수를 써도 우리 편이 이기면 그만이라는 정치고관심층과 이놈이 되든 저놈이 되든 언제나 똑같다는 체제 개혁의 비전을 체념한 정치무관심층이 사회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면 앞으로 세상은 나아지리라는 희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