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앵무새가 될 수 있고 앵무새를 죽이는 죄를 범할 수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면서 우리네 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기존의 방식처럼 가정, 학교, 학원, 회사, 동아리, 사교 모임 등에서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사이버 환경에서 공통의 관심사와 목적으로 서로 알아가고 정보를 공유하며 친목을 도모하는 예도 흔하다. 누군가와의 관계 형성이 쉽고 편리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을 기회와 방법 등이 다양해졌지만 우리는 과거보다 외로울 때가 많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감정에 맞춰서 그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상식적인 관계는 거리낌도 분노도 적으며 오히려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편하다. 익명성이 보장되거나, 혹은 서로가 아는 관계일지라도 간접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사이버 환경에서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감히 할 수 없는 거짓과 분노로 가득한 정서적 배설이 직접 대면한 관계에서보다 쉽게 나타난다. 사실을 왜곡하고 위장함으로 거짓은 거짓을 더 키우고,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이해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문제들이 결국 서로에게 이중, 삼중의 상처만을 남기면서 진실과는 점차 멀어지고 만다.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의 인종차별과 부조리한 사회 문제를 6세 여아 스카웃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스카웃의 아버지인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 펀치는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남성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는다. 그가 작품에서 아직은 어린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내용이 있다. 그는 같은 백인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흑인의 상황과 입장을 변호해주며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자녀들에게까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도록 권유하고 그 자신도 자녀의 심정으로 그 마음을 헤아리고 경청하고 조언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상으로 작품 전반적인 내용에서 다뤄진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인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즉 역지사지는 익명과 비대면의 관계가 비일비재한 요즘 사회에서 진실 됨과 위안을 가져오며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열쇠이다. 그렇다면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기 위해선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정서가 미성숙한 시절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 예를 들어 부모와 같은 일차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부정적인 감정을 ‘콤플렉스, 마음속 응어리, 핵심감정’ 등이라 일컫는다. 이는 정서와 사고뿐 아니라 행동을 지배하며 건강한 역할로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된다. 다만, 적절히 해소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쌓이다 보면 유사한 상황마다 반복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현실을 왜곡하고 행동 문제를 유발하고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과거 경험으로 만들어진 부정적인 감정에 직면하여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즉 나 자신의 콤플렉스, 핵심감정을 잘 파악하고 있을 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헤아리고 공감할 수 있다.
핵심감정을 파악하여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서로를 반영한다. 상대방에 대한 기존의 관점이나 선입견, 습관적인 이해를 배제함으로써 착각,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판단을 중지하고 온전히 상대의 감정만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6살 스카웃과 초등학생 젬 남매, 그리고 그의 친구 딜의 시선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 대해 기존의 관점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직관을 시도한다. 작품의 상당 부분 소문만 무성하고 좀처럼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부 브래들리가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무서운 괴물, 식인종에 가까운 야만인으로 그려지지만, 이들은 브래들리의 집에 찾아가 접촉을 시도한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그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다. 핀치는 작품에서 아무에게도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우리에게 노래만 불러주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죄라고 선언한다. 아마도 작품에서 ‘앵무새’로 지칭되는 것은 1930년대 미국 남부지방에서 사회적 약자로 대변되는 흑인, 톰 로빈슨과 가십과 소문, 편견과 선입견에 가려져 괴물로 인식되는 장애인, 부 브래들리가 아닐까 싶다.
작품에서는 당시 편견과 선입견이 가득했던 대상인 흑인과 장애인을 대표적으로 언급했으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우리는 누구나 앵무새가 될 수 있으며, 반대로 우리는 누구나 앵무새를 죽이는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익명과 비대면의 관계 형성이 보편화 된 현대 사회에서 앵무새 죽이기는 더 흔해졌다 볼 수 있다. 자신의 핵심감정을 파악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하는 노력, 이런 작지만 소중한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가 있을 때, 문명과 기술이 발달했지만, 그에 발맞추어 성장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정의와 평등이 가득 채워질 수 있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우리는 용기와 사랑으로 외로운 마음을 채워나갈 수 있으리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