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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널하우스 Oct 25. 2024

나름 능동형 인간


나는 수동형 인간이다. 좋아하는 것은 잘 모른다. 싫어하는 것은 잘 안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을 피해 오다 보니 지금의 내가 되었다. 자연히 좋아하는 것을 하기보다 싫지 않은 것을 해왔다. 방청소를 예로 들어보자. 청소가 귀찮고 싫어서 널브러진 방을 내버려 둔다. 그러다 더러운 게 싫어서 다시 방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단순한 사례이긴 한데 중요한 건 여기에 '좋아서'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부탁도 싫지 않으면 들어주는 편이다. 좋거나 싫은 부탁은 그다지 없었다. 세상이란 이상하게도 좋아하는 것보다 혹은 싫어하는 것보다 좋지 않거나 싫지 않은 것의 범위가 더 넓었던 것이다. 애매모호한 중간지대가 가장 넓달까. 그러다 보니 오히려 도와줄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난다. 여러모로 범위는 넓지만 깊지는 않은 그런 인간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나는 능동형 인간에 대한 환상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이 축복받은 것 같고 올인하는 모습이 참 멋있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기까지 해 버린다면 그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싫어하지 않는 일을 해와서 모든 게 어중간할 뿐인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곤 한다. 


그러다 요새 부쩍 나도 능동형 인간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 이상한 능동형 인간이긴 한데,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기보다 싫어하는 일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도 어찌 보면 나름 능동형 인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는 타인을 위할 때였다. 나를 위해서는 절대 못하는 일도 이상하게 타인을 위해서라면 가능해진다. 다시 방청소를 예로 들어보자. 청소가 귀찮아서 하기 싫어도 누군가를 집에 초대해야 한다면 '그래도 청소기는 한번 돌려야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 물때도 닦는다. 쌓인 쓰레기도 치운다. 카오스의 게이지가 다 차기도 전에 능동적으로 청소를 하는 내 모습을 나는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타인을 위해서라면 싫어하는 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사람이구나. 뭘 그런 걸 가지고 깨달았다고 하느냐 물을지도 모르겠는데, 나에게 이는 실로 엄청난 발견인 것이다. 그때의 나는 굉장한 몰입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라는 지고의 상투구가 왠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소프트웨어 개발도 내가 쓸 거라면 적당히 느슨하게 만들 텐데 누군가 사용하고 그 대상이 특정될수록 더 정밀하게 만들게 된다. 춤을 출 때나 연기를 할 때도 관객의 얼굴이 선명하게 상상될수록 더 연습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 딴에는 능동적일수록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된다. 


물론 수동적인 삶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내가 나는 싫지 않다. 그런데 우스운 건 싫어하는 일을 그것도 타인을 위해서 하는 내가 좀 괜찮아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가끔은 보람도 있고 때때로는 좋다고도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프로세스를 내 무의식이 기특하게도 캐치를 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능동형 인간을 부러워했던 것을 정확히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런 부분이었던 같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몰입하는 것이 부러웠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게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항을 바꾼다 해도 수식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몰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설사 내가 귀찮고 싫어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서 능동형 인간이 된다는 것은 왠지 싫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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