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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ang May 27. 2023

기다림의 빵, 슈톨렌

안희연의「슈톨렌」을 읽고

  상실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듯하다. 소중한 대상을 하나씩 떠나보낼수록, 마음에 빈칸이 늘어간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숨쉬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통보는 매번 당황스럽기만 하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검은 옷을 입고 보내야 하는 일명 ‘애도의 시간’이다. 여러 사람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좁은 공간에서 애써 덤덤한 척을 하며 버티고 견뎌야 하는 시간은 끝이 보이지 않더라.

  누군가 나의 글을 읽는다면 정 없는 냉혈한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하염없이 울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죽은 대상이 간 곳을 바라보기만 하기보다는, 다시 삶의 자리로 걸어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를 기억하고 기다려야 한다.

  작년 한 해는 죽음의 편으로 보내주어야 했던 이가 유난히 많았다. 더 이상 함께일 수 없다는 충격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선뜻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종이와 펜은 거리낌없이 들어 주었다. 이 글은 내가 쓴 글 중 가장 솔직한 생각을 담아낸 글이다. 나의 이야기에 대해 온 마음을 담아 쓴 이 글을 첫 글로 게시한다.


기다림의 빵, 슈톨렌


  죽음의 무게는 결코 가볍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마음의 짐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후 남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슬퍼하며 아파할 것을 요구해 왔다. 부재의 자리에는 슬픔만이 남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이에 대한 언급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금기시되고, 모두가 떠난 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깊은 슬픔에 빠져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해진다. 오로지 눈물만이 허용되는 검은 애도의 시간 속에서 남은 이들은 사랑하는 이와 더 이상 맞닿을 수 없다는 괴로움에 자신의 본래 삶으로 쉽게 돌아가지 못한다.

  상실이 불러오는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애도의 방식일지 의문이 든다. 삶과 죽음은 단 한 걸음 차이라 하지만, 우리는 각각의 세계에 놓인 사람들끼리는 다시는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장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도, 상실의 괴로움에 매몰되지 않은 삶의 자리에서, 거리를 둔 채 죽은 이를 기억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지내야 한다. 이러한 사랑과 기다림을,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안희연은 ‘슈톨렌’에 비유한다. 슈톨렌은 독일의 빵으로,  반죽에 말린 과일, 설탕에 절인 과일껍질, 아몬드 등을 넣어 구워낸것이다. 이 ‘슈톨렌’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 조각씩 잘라 먹는 ‘기다림의 빵’으로, 슬픔의 양에 비하면 충분하고, 남은 이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준다. 이처럼 안희연은 상실의 끝자락에는 슬픔과 눈물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슈톨렌」이라는 시를 통하여 보여준다.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피가 찔끔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 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슈톨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 조각씩 잘라 먹는 기다림의 빵.


- 「슈톨렌」 전문


  시는 입가에 설탕을 잔뜩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빵을 먹는 ‘너’의 말로 시작된다. 이때, ‘너’의 말에는 상실의 경험이 담겨 있다. ‘너’는 어떤 대상이 건강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 먹였지만, 결국 밖에 나가서 죽어 왔다며, 최선을 다했지만 차마 예상하거나 막지 못했던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너’가 잃은 대상은 분명 ‘너’에게 소중한 대상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몸에 좋은 것을 다 찾아 먹이는 것만으로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 삶이 담보하는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며, 그것 또한 삶의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빵을 먹으며 죽음을 말하는 ‘너’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상실을 말할 때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빵을 먹는 행위가 수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자는 ‘너’가 맛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상실을 이야기하듯, 압정에 찔렸을 때처럼 아픈 기억이라도 그 기억을 “퍼즐 한조각만큼의 무게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부정적이고 아픈 기억으로 여겨지는 죽음을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화자의 태도는 곧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와 맥을 같이한다. 죽음이 재난이라고 한다면, 그 예측 불가능성과 불가피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순간에 사랑했던 대상을 잃은 ‘너’에게 상실의 경험은 찔리면 피가 나는 “압정”으로, 춥고 외로운 “겨울”로 다가온다.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그것을 꼭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시에서는 아픈 기억을 대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퍼즐 한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제시한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경험해 왔고, 앞으로 또 경험할 무수한 상실에서 오는 슬픔의 무게를 담담하게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아 준다.

  우리는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아픈 기억을 대하기를 회피하지 않고, “손이 벌겋게 얼더라도 장갑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 뛰쳐나간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대신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네 그리움”이 만든 “눈사람”은 ‘너’가 잃은 대상의 형상이라기보다는, 눈이 잔뜩 쌓일 정도로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 낸 ‘너’ 자체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과 함께 있지 않은 어떤 대상을 그리워한다 하면 그 대상을 만나고 싶어 하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 역시 그리움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보고 싶었다며 그리움을 직접 말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돌에 마음을 실어서 보낸 뒤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이 행위는 곧 “기다림”이다. 그리움을 기다림으로 승화시켜 눈사람이 된 ‘너’는 이미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보고 싶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두 대상 간의 대면이 필요하다. 그러나 삶의 세계에 있는 대상과 죽음의 세계에 있는 대상은 서로 만날 수 없고, 보고 싶었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 힘이 없는 것이 된다. ‘너’는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대상과 자신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기에, 말 대신 마음이라는 돌을 있는 힘껏 던져 상실의 대상이 있는 세계로 보낸 후,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와 신나는 “기다림”, 신나는 삶을 지속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기다림”을 목적어로 갖는 ‘사랑하다’라는 술어에 주목해 보면, 동일한 술어가 “겨울”,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목적어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반복으로 미루어 볼 때, 화자는 비록 상실을 경험하였지만, 그 아픈 기억을 아프게만 말하지 않고 한발 떨어져 사랑할 수 있을뿐더러, 상실 이후에 남은 자신의 삶, 삶 속 기다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상실의 대상을 향한 ‘너’의 마음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대상을 사랑했기에, 아픈 기억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돌을 던질 수 있으며, 마침내는 자신의 세계에서 계속되는 기다림, 즉 자신의 남은 삶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빵”이라는 시어는 “펑펑 울고 난 뒤에 잘라 먹으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슬픔의 양에 비해 충분한 것”이다. 이때의 빵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한 조각씩 잘라 먹는 기다림의 빵인 슈톨렌으로, 남은 삶 속 기다림의 은유이다. 슈톨렌과 삶은 펑펑 울고 난 뒤에도, 그러니까 상실의 슬픔 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이고, 그 남은 양이 충분하다는 유사성을 공유한다. 화자는 ‘너’의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볼 수 있지만, 그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너’는 펑펑 울고 난 뒤에는, 충분한 빵을 잘라 먹는, 남은 긴 삶 속에서 사랑하던 상실의 대상을 기억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며 돌볼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과일 등의 재료가 물크러져 형태가 사라질 때까지 약한 불에서 오랫동안 졸여서 만드는 달콤한 잼은 형태가 없으며, 얼마든지 오랫동안 따뜻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상실과 기억의 은유다.

  상실이라는 “압정 같은 아픈 기억”, “겨울”은 때때로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분한 남은 삶 속에서 언제나 설탕이 잔뜩 묻은 달콤한 빵을 먹으며 자신을 돌보고, 약한 불에서 잼을 졸이듯 죽음을 “퍼즐 한조각만큼의 무게”로 이야기할 수 있음을 깨닫고, 사랑을 바탕으로 한 기다림을 계속한다면 아픈 기억은 빵에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잼”이 되어 우리의 삶을 한층 단단하고 달짝지근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과 희망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삶은 만남의 연속이라고 한다. 만남의 끝에는 언제나 이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삶은 상실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크고 작은 상실을 경험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함께했던 존재의 세계를 영원히 갈라놓는 일이다. 따라서 연결과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은 소중했던 대상과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됨으로써 깊은 절망과 슬픔을 느끼고, 죄책감에 매몰되어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세계로 쉽사리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 문화는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남겨진 사람들은 떠난 이와 닿을 수 없음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인은 「슈톨렌」을 통해 상실을 대하는 또 다른 방법을 ‘너’라는 인물을 제시함으로써 이야기하려 한다. ‘너’에게 죽음은 빵을 먹을 때 맛있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다룰 수 있는 것이며, 아프지만 퍼즐 한 조각만큼의 무게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죽음과 상실은 슬픔의 감정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상실의 경험 앞에서 우리는 펑펑 울어도 된다. 그러나, 그 후에는 ‘빵’을 잘라 먹어야 한다. 아픔과 슬픔에 매몰되어 죽음의 편에 머무르기보다는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함께 있지 않기에 가능한 기다림을 지속하며, 맛있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올 정도로 설탕이 잔뜩 묻은 달콤한 빵을 먹으며 스스로와 다른 생명의 삶을 돌보아야 한다.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기 때문이다. 눈앞의 압도적이고 거대해 보이는 슬픔과 아픈 기억은 남은 충분한 삶을 보내다 보면 사랑 덕분에 “빵”이라는 삶 속 기다림과 삶 자체를 더욱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달콤한 잼이 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언제나 삶에 드리워 있는 죽음은 우리의 행복을 망치려 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행복을 말해야 한다. 상실의 자리를 무언가로 채우지 않아도 된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설탕이 가득한 슈톨렌을 잘라 먹으며 삶에서의 달콤함을 찾다 보면, 공백을 껴안고 흘러가는 삶을 덤덤하게 견뎌내다 보면 괴로움의 기억과 눈물 역시 오랜 시간 졸인 잼처럼 기다림의 삶을 든든하게 받쳐 주는 힘이 될 것이다. 안희연이 「슈톨렌」을 통해 전하는 위로가 상실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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