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대하여, 에세이
나는 라면을 좋아한다. 내 현재 최애라면은 진순이다.
어렸을 적부터 엄마의 라면픽이 진라면 순한 맛이었기에 내가 고른 것이 아님에도 나는 진순을 라면맛의 디폴트로 여겼다. 진순은 우리나라 원탑라면은 아니다. 심지어 형제라인인 진매에게도 밀린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면맛의 디폴트라는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거다. 나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무튼 나의 원픽은 진순이다.
라면이라는 음식은 인스턴트이다. 그러니까, 몸에 좋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음식이다. 칼로리도 높고, 기름지고, 나트륨 함량도 높다. 나 같은 이에겐 소화불량에 시달리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소화기관이 도통 좋지가 않다. 대식가도 없고, 입도 짧고, 조금만 몸에 안 좋은 성분이 들어가면 몸에서 바로 이상반응이 온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제도 맛있게 삼겹살을 먹다가 소화불량이 온 엄마의 등을 힘껏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엄마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소화제를 사 왔다. 소화불량은 일상이다.
난 그래서 먹방으로 유명한 쯔양이나, 햄지 같은 유투버들을 보면 정말 나와 같은 원소로 이루어진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신기하고, 희귀하게 느껴진다.
라면을 잘못 먹은 날에는 의도치 않게 부채표와 함께 잠이 들어야 한다. 심하면 그날 잠은 다 잤다. 새벽녘 변기와 함께 원하지 않는 티키타카를 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낸 사람들이라면 이 고통이 보통의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 찝찝하고 역하고 거슬리는 식도의 느낌을, 그런 탓에 나는 라면을 매일 먹고 싶지만, 건강하고 슬기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주입함을 택한다.
‘한 젓갈 먹을래?’
난 안다. 한 젓가락이 두 젓가락이 되고 세입이 네입이 된 다는 것을. 라면을 외면하는 길,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이다. 오늘 밤도 여전히 그를 태연하게 외면해 본다.
어느 날, 라면이 먹고 싶은 나는 내 위장들과 타협할 수 있는 라면을 먹을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한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홀린 듯이 동네마트로 들어간다.
라면코너 앞 다양한 라면들 옆에 낮은 칼로리가 매력적인 컵누들 패밀리들을 본다. 아무리 높은 칼로리라도 200을 넘기지 않는 이 착한 아이들.
‘그래… 기름에 튀기지 않은 하얀 덩어리들! 이런 애들이 있었다!’
라면을 한창 먹을 때는 있는 줄도 몰랐던 컵누들 패밀리. 이제는 내 눈에 꽂혀 나의 원픽이 된다. 격일에 한 번씩 먹는 컵누들은 우리 집 찌개 보다도 소화가 잘 된다. 단 절제의 맛이라 양이 약간 부족해 아쉽게 끝내긴 한다.
컵누들은 다양한 맛이 있다. 진짜 너무 많다. 기본적인 우동맛, 매운맛, 그리고 쌀국수 라인, 짜장,로제도 있다. 개인적인 원픽은 매운맛이다. 똠양꿍과. 찜닭맛도 먹어보았지만 호불호가 갈릴 맛이다. 처음 먹는 이들은 이 하얀 면발들과 양을 보면서 이거 먹을바에.. 차라리 라면 반 개를 먹겠다 라는 생각을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먹다보면 안다. 컵누들 특유의 깔끔하고 담백한 맛.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 속 편한 느낌. 절제 했다는 마음의 소소한 행복.
난 여전히 진순을 좋아하지만 진순은 가끔 만날 수 있는 임팩트 있는 친구의 느낌이라면 컵누들은 늘 내 곁에서 함께 머물러주는 찐친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컵누들은 내 생활에 떼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나는 그렇게 컵누들에 누며들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도 진라면 같은 관계와 컵누들 같은 관계가 있다.나도 누군가에게 진라면 같은 존재이며 컵누들 같은 존재일 것 이다. 그리고 이 두 관계는 트랜스포머처럼 모양이 때에 따라 변한다. 어느 것 하나 고정적이진 않다.
나의 관계들을 살펴보았다. 나는 시간이 흘러 학창시절 친구들과 진라면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만날 수 없다. 서로의 일도 바쁘고, 서로의 가족이 있고, 사는 곳도 멀다. 그리고 지키고 챙겨야 할 것 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만남의 빈도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만남이 주니 옥신각신하던 갈등도 준다. 우리는 일년에 한번 해가 바뀌기전, 일년에 한번도 못 볼 것 같은 위기감에 약속을 잡거나, 집들이나 결혼식등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만나는 사이로 변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당연해졌다. 각자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고 열심히 살면서 어쩌다 만나는 이벤트로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응원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그 임팩트있는 하루를 마무리 한다.
처음 그녀들과는 컵누들 같이 시작 했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았고, 같은 반이였고, 옆자리 짝궁 이였으며 함께 매점에 뛰어가서 군것질을 하는 사이. 또 선생님께 함께 혼나기도 하고, 공부도 같이 했던 사이. 그렇게 거의 매일 만났다. 그 시절 내 인생에서 그녀들은 삶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그 시간들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 했다. 그녀들과 나 사이. 서로가 서로에게 누며든 생활이라 당연한 줄 알았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우리는 각자의 대학으로 진학했고, 지금은 어엿한 사회의 일꾼들이 되어 서로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
지금 나에게 있어 컵누들 같은 관계는 무엇이고 누구일까? 학창시절처럼 그렇게 매일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삶을 나누진 않지만, 생각 해 보자면 사회에서 만난 느슨한 연대의 사람들이다. 예전처럼, 직장이나 가족이나 오래된 친구들이라고 해서 컵누들 같은 관계를 내어주진 않는다. 오롯이 나의 관심사와 목적에 따라 삶을 나누는 사람들이 바뀐다. 나는 평일 새벽 함께 독서토론을 하는 소모임 친구들을 만난다. 랜선으로 하루의 시작을 그들과 함께한다. 이제 만난지 3개월차에 들어가는데, 그들과 사적인 이야기들을 깊게, 자세히 나누진 않지만 익숙해 져서 인지 하루라도 안보면 서운한 마음이 든다. 그들에게 누며들었다.
나는 글쓰는 모임을 좋아한다. 간간히 나가는 글모임에서 글을 쓰고 서로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시간들이 재밌다. 누군가와 글로 소통한다는 것은 참 특별하다. 창의적인 생각도 마구마구 떠오르고 그것에 대한 제한도 없다. 즐겁다. 역시 그 시간들에 누며들었다.
이런 모임들의 특징은 내가 누구고 나이는 몇이고 무슨 일을 하며 결혼은 했는지 등의 사회적 호구조사를 과감히 떼고 수평적인 관계로서 존중 받을 수 있다는 것.
말하고 싶을 때 자연스레 말하면 된다는 것. 사회적 겉치레의 ‘나’ 가 아닌 그냥 ‘나’ 라는 인간으로서 존재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자극적이거나 속이 쓰리지 않다는 것.
그 때문에 지금의 나는 이 깔끔하고 담백한, 컵누들 같은 느슨한 연대의, 누며드는 관계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인간은 진사회성 특징을 가지고 있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거기서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관계 때문에 우리는 여러 고통스러움을 맛보기도 한다. 가족간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친구들과의 관계,선후배관계,연인과의 관계등.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주는 관계로 충분히 변질 될 수도 있는 관계. 하지만 이런 관계들의 덩어리들이 내 인생에 대해 알아가고 나를 알아 가는데 좋은 트리거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관계가 없다면 이 관계에 대해, 나에 대해, 생각 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고, 좋은 관계에 대해 고마움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국 모든 관계는 내가 이것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도움을 받기도 하고 피해를 받기도 할 것이다. 결국 선택은 나의 몫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진라면 같은 관계는 소중하다. 참으로 맛있고, 매콤하며 그 맛 때문에 내 인생에서 순간의 짜릿함과 즐거움을 느낀다. 때론 과도해서 통증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자주 느끼지 못 하기에 만날 때 마다 그 시간에 최선을 다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래간다.
내 인생에 있어서 컵누들 같은 관계는 소중하다. 참으로 담백하고, 시원하며, 뒷맛이 깔끔하기에 언제 만나서 누며들어도 거리낌이 없고 소소한 행복을 쌓게 도와준다. 없으면 뭔가 심심한 그 느낌.
나는 또 나의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관계들을 만날 것이고 그 때 마다 진라면과 컵누들같은 관계들은 섞이기도 갈라지기도 추가되기도 비워지기도 하며 그 시기에 따라 슬라임처럼 시의적절하게 바뀔 것이다.
그리고 난, 그 관계들을 어색하지 않게 맞이 해 주기로 다짐한다.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관계는 없다. 그것이 나는 진순파지만 컵누들을 자주먹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