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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날 Aug 09. 2021

고래우산아, 금요일이야

폭우에도 마음이 넉넉한 그런 날이 있다

금요일 퇴근길,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픽업해 근처 운동장을 같이 한 바퀴 걸었다. 낮에 한차례 요란하게 비가 오더니 냄비처럼 뜨겁던 한여름의 공기가 기분좋게 식어 있었다. 아이는 폭염에도 매일 하원길에 이 운동장에서 놀고 싶어했는데 지난 2주간 끔찍하게 더워서 단 한 번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어릴수록 아주 덥고 아주 추운것에 어른만큼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것 같다. 놀고 싶고 뛰고 싶은 욕구가 피부 감각을 이겨 버리는 거라 생각하면 참 귀여운 본능덩어리 들이다 싶다. 마침 남편도 야간 근무다. 오늘이 날이다 싶어 순순히 그래, 갈까? 하니 큰 기대안했는데 얻은 선물마냥 화들짝 놀라며 내 세살 아이는 너무나 신나게 뛰어간다.


아이는 뛰고 걷고 쪼그리며 즐거워했다. 빗물이 고인 물웅덩이에 발을 첨벙거리며 흙탕물을 적시는 것도 마음껏 하도록 뒀다. 그냥 이날은 그러고 싶었다. 아이에게 어쩌면 가장 많이 말하는 하지마, 빨리해, 이 두 단어에 나 역시 신물이 나있었는데 크게 위험하지 않으면 그냥 하게끔 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금요일 퇴근 후 저녁, 바쁠 것도 기다릴 것도 없으니 내 어린 아기를 언제나처럼 재촉하지 않아도 되는 날. 그 작은 두 발이 내 말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총총 대는게 좋았다. 한차례 비온 후 땅에 뒹구는 지렁이떼를 포식하는 건지 크고 작은 동네 새들이 잔디를 쪼고 있었다. 나도 만지고 싶어! (지렁이는 아니겠지) 하며 뛰어가서 날아가게 하고를 여러번 반복하는 내 작은 아가의 흥분했다 실망했다 하는 반짝이는 눈빛에 일주일의 정글 탐험을 막 끝낸 긴장이 점점 누그러졌다.


아이도 더 놀고 싶어하고 나 역시 집에 들어가 집안일에 매이기 싫었다. 대형마트에 가서 카트에 앉히고 장이나 봐올까 하다가 오랜만에 걷기 좋은 날씨인게 아까워 멀지않은 상가길을 산책하고 어딘가에서 저녁거리를 포장해 오기로 했다. 인근 아파트 상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이를 안아 내리려는데 비가 한방울씩 떨어졌다. 트렁크를 뒤져보니 유아용 고래 우산 하나만 있다. 내가 든다 엄마가 도와주마 나 혼자한다 앞을 봐라 엎치락 거리며 세월아 네월아 진전 없는 거북이 발걸음을 옮긴다. 한걸음 걷는데 세상 모든 잔디 개미 실외기 쓰레기통 다 참견하고 그 와중 제 몸보다 큰 고래 우산도 질질 끌며 걷다보니 2시간 같은 20분을 걸었는데 이제 어른 스무걸음 왔다. 평소였으면 참을인을 새기며 걸었을텐데 이날은 그닥 지루하지도 짜증스럽지도 않았다. 아이가 인파에 부딪칠까 이슬비에 젖지 않을까 신경쓰느라 몸은 좀 고되지만 마음이 편안했다. 딱히 회사에서 앓던 업무를 시원히 끝낸것도 아니고 컨디션이 유독 좋거나 특별히 기분 좋은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날은 그냥 그런, 너그러운 날이었다.


빗방울이 조금 굵어져 더 이상 우산 없인 무리다 싶어 ‘우리 이제 돌아갈까?’ 하며 아이를 안아 올렸는데 요이땅 한 것 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끈이 짧은 숄더백을 말도 안되게 크로스로 머리를 꿰어매 두 손을 확보한 뒤 아이를 최대한 가슴에 밀착해 안아들고 작은 고래 우산으로 아이와 내 머리만 가리고는 폭우속을 뛰어간다. 아가씨때라면 내 머리가 젖을 지언정 가방을 끌어안았을 텐데 지금은 더 소중한 것을 보물인양 안고있다.  빗속에 꼭 끌어안을 소중한 온기가 있어서 좋고 아직은 내가 몸으로 지켜줄 수 있어 좋다. 난감하지만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아가와 나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같이 키득거리는 합 좋은 한 팀이라 좋다. 아이는 나보다 잘 들고 뛰겠지만은 준비성의 미흡함이나 대처 부족 혹은 효율적 동선의 어긋남 같은 것을 논하는 남의편도 옆에 없으니 몸은 고되도 오히려 홀가분 했다면, 뭐 조금 서운해 할지도.


 이렇게   밥이나 먹고가자 하고 들어간 작은 동네 식당의 나이지긋한 남자 사장님은 비를 피해 달려온 아기와 엄마에게  배려를 많이 해주셨고  안먹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가 왠일로 돈까스에 우동을 제법  받아먹어줬다. 여유롭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맛있고 즐거운 한끼를 했다.  사이 그친 비에 길을 나서니 하늘이 어둑어둑 하다.  잘먹었으니 사주마 약속했던 뽀로로 주스에 덤으로 막대사탕까지 획득한 아이는 기분이 하늘까지 았다. 사탕과 주스를 한번씩 번갈아 먹는 아이를 태우고 운전해 오는 저녁, 라디오에선 디제이가 “어디서 누구와 금요일 저녁을 즐기고 계시나요?”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냈다. 진짜 금요일 즐긴  같아, 라고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혼잣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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