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 사과는 잘해요

소설

by NUNCIUS

이기호 장편 소설 《사과는 잘해요》 (현대문학 2009)



정신요양시설에서 학대받은 화자가 주인공이다. 시설에서의 약물 복용으로 인지 능력이 온전치 않고 고르게 사회화되지 못한 인물이라 지능이 낮은 어린이와 같은 특성을 보인다. 천진한 구석이 있고 거짓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당사자는 진지한데 독자가 읽기에 익살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마구 웃다가 진짜 의미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처절하고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문체와 내용의 대조가 절묘해서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시설의 비리를 폭로하고 시설에서 나온 화자와 화자의 친구는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친구 여동생에게 얹혀 산다. 가진 것도 없고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 화자는 자신에게 가족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이들은 피해자이지만 경찰의 보호조차 전혀 받지 못한다.


더욱 슬프게도 화자와 친구는 분명 피해자이지만 그들 스스로 가해자가 된다. 시설에서 보고 들은 것, 겪은 일이 뻔했으므로.


소설에 나온 사건들 중에 어느 어머니와 어린 아들,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다른 여자에게 간 아버지의 사죄에 관여한 사건이 있다. 이 똑부러진 초등학생 아이는 죄와 사과의 본질과 속성, 심리에 대해 주인공보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보다도 훨씬 잘 알고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죄는 무엇이고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죄 3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두 번째 소설은 《차남들의 세계사》, 세 번째는 아직 출간 전인 것 같다.




“나중에? 왜? 아직 사과 받을 게 남았어?”

아이는 절뚝절뚝,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 벽에 달린 거울을 닦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우리 무릎 아래로 튀었다.

“아직도 많아요.”

우리는 거울에 비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아이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시봉이 물었다.

“그런데 왜 네가 청소를 하는 거야? 넌, 사과 받는 사람이잖아?”

아이는 잠시 거울을 닦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거울 속 우리를 노려보았다.

“더 미안해지라구요. 그게 내가 여기 있는 이유예요.”

아이는 거울에 확, 물을 끼얹었다. 아이 얼굴과 우리 얼굴이 함께 흘러내렸다. (156)


의뢰인은 아이의 접시에 자주 탕수육을 올려놓아 주었다. 그때마다 아이는 살짝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시봉도 내 접시 위에 탕수육을 올려놓아 주었다. 나는 그냥 받아먹기만 했다. (157)


나는 뿔테 안경 남자의 사과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끝까지 우리가 도와주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시봉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가 도와준 부분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170~171)


“그래도 집에 가니까 좋지?”

아이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시봉은 계속 말했다.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아이는 잠깐 시봉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곤 말했다.

“아저씨들 바보예요? 진짜 우리 엄마를 생각해서 나를 보내주는 거 같아요?”

시봉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진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못 견디겠으니까 보내주는 거예요. 나랑 있으면 자꾸 자기 죄가 생각나니까.”

(177~178)


그때 시봉과 나는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나중에 혹시 나한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말이야.”

“그러면?”

“그냥 너한테 해.”

“나한테? 너한테 할 사과를?”

“응.”

“왜?”

“뭐, 내 대신 네가 받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계속 시봉에게 죄를 짓고 싶어졌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순 없었으나, 나는 시봉에게 꼭 죄를 지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시봉에게 죄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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